부활신앙(2): 준비해야 합니다.
눅 16:19-31
믿는 자들에게 있을 부활은 우리들로 하여금 준비하는 인생으로 만들어 줍니다. 무엇을 준비하며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지를 거지 나사로와 한 부자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은 하고 계십니다.
첫째, 부활신앙은 인생으로 하여금 죽음을 준비하게 합니다. 죽는 그 순간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를 위해 준비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느냐는 그 사람의 죽음 이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오기 전에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부터 한 사람의 삶의 결과가 바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2, 23절에 그 다른 결과를 아브라함의 품과 음부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죽음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못 믿고가 우리의 죽음 그 자체를 편안하게 아니면 고통스럽게 죽게 만드는 결정 요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산 사람들도 불의의 사고로 아니면 사자 밥이 되어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장 억울하게 죽은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죄 없는 분이 죽임을 당하신 예입니다. 한편, 선하지 못한 자가 이 세상에서 잘 살다 편하게 죽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거지와 부자의 이 땅의 삶은 너무나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습니다.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자색옷은 임금이나 고위층을 상징하는 색입니다. 그가 이 땅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리며 살아갔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사고는 부자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켜 축복을 받은 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자는 사람들의 칭찬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부는 당시 매우 비싼 의류와 질감으로 된 겉옷과 속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파티를 즐기며 사는 삶이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매우 부러움을 사고 누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부유함도 잔치의 흥도 없이 그저 부자의 집 문 앞에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살아갔습니다. 22절에는 이 두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한 거지는 가난하고 천한 지위에서 고통스럽게 병으로 죽어갔습니다. 한번도 자신을 위해 약도 사용하지 못하고 개가 헌데를 핥아주는 그런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인생의 죽음이 엉망징창 기준이 없이 우리에게 혼란스럽게 보여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죽음이 마지막이라면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었을 것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죽음 이후가 최종적 기준이 적용되는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확고한 기준을 성경은 마 25:46절에서 영생과 영벌에 들어간다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부활의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 이후에 반드시 가야 할 곳을 준비하게 합니다. 유학생활이나 이민생활을 하다 보면 자주는 아니지만 몇 번 이사를 하면서 살게 됩니다. 서부에서 오든 동부에서 오든 이타카가 살아야 할 곳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빨리 적응을 하는 편입니다. 여러 이유로 이사를 하지만 하나 공통적인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이사 전에 먼저 내가 가서 살 곳을 마련합니다.
여기 계신 우리 모두는 반드시 예외가 없이 이사를 한번 더 가야 합니다. 사람은 두 번의 다른 주소를 가지게 됩니다. 현세와 내세라는 주소입니다. 현세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세의 거주지를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이사할 거주지를 미리 만들어 놓지 않으면 바로 이사 당일에 매우 당황하게 될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 사람이 죽는 순간부터 다르다는 것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22절에 의하면 거지 나사로가 죽는 순간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부자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단지 부자가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으로 있는 모습으로 바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물로 이 비유를 가지고 신학적으로 죽음 이후를 논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한 인생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부터 이 땅에서의 삶이 사후세계를 달라지게 만든다는데 이 비유가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나사로는 믿는 자이고 부자는 믿지 않는 자라는 어떤 힌트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근거는 결과가 예수 믿는 자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의문스럽지만,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한편, 부자가 예수를 믿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제일 가는 계명조차 지키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며 살려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삶의 증거입니다.
부자라고해서 지옥에 가고 거지라고 천국에 간 것은 아닙니다. 고넬료가 안겨 있는 아브라함도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본문의 부자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도 분명 그의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더 많이 그의 이름이 회자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동네 부자 누구, 정말 부자야. 매일 잔치에 정말 부러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살아있을 동안에는 오르내렸는지 모르지만 성경은 그의 이름을 기억조차 못하고, 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성경은 그의 이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이름이 아니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13:8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 경배하리라.” 더 확실한 계시록 20:15절을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을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주인으로 입술로 고백하고 내 속에 영접한 자를 의미합니다. 그가 아무리 돈을 가지고 살았다 해도 그는 그 돈으로 자신이 죽어서 가야 할 곳을 마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을 너머 하나님의 법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이 가르치고 있지 않는 영역입니다. 오직 기독교 만이 알려주고 준비하게 하게 합니다. 죽음으로 끝이나는 것이 인생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새로운 시작이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 신앙은 착각 없는 인생을 준비하게 합니다. 하늘 나라는 이 땅의 삶과는 다르다는 것을 미리 알게 합니다. 믿지 않는 자가 죽고 난 뒤 여전히 착각하고 있는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23절부터 보면, 부자가 고통 가운데서 눈을 들어 나사로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24절에서 아브라함을 이렇게 부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뭐 별로 틀린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으로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만약 음부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자가 진정 자신의 아들이라면 어느 아버지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를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 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선언합니다. 부자는 지금 여전히 자신이 땅에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땅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뜻만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두 번째 착각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시켜 손에 물을 적셔 불꽃 가운데 고통하는 자신의 마른 입을 적셔주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대단한 착각입니다. 나사로는 땅에서는 자신의 문 앞에서 얻어 먹고 자신의 발 앞에 엎드리는 존재였습니다. 땅에서는 나사로보다 자신이 더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았는데 지금 왜 자신이 이런 처지자 되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위치와 누림이 하늘에서도 동일하게 누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에게 종처럼 명령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안 됩니다. 지옥이 바로 이런 곳입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영원히 안 되는 곳입니다. 이것이 사망입니다. 지상이라면 돈으로, 권력으로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는 일을 하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적용되는 곳이며 그 사랑은 생명입니다. 지옥은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만이 적용되는 곳이며 그 공의는 사망인 것입니다.
착각하고 있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부자는 너무 고통스러워 지상에 사는 형제들에게 자신이 있는 같은 곳에 오지 못하도록 나사로를 보내 증언해 달라고 부탁합니다.그러나 그와 나사로가 선 사이에 건너오지 못할 구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구렁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죽음이 마지막이다’라고착각하게 만듭니다. 아무도 죽음 이후 돌아온 자가 없기에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대단한 착각입니다.
그들이 건너올 수 없기에 계속 복음을 알리는 자들을 지금도 보내 끝이 아님을 알립니다. 음부에서 고생하는 자가 하나님께 부탁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파송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세를 보지 않고 믿는 자들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 되도다 말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보고 믿는 자가 아니라 믿고 경험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증거’(히 11:1)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죽음 이후의 모든 것을 준비하는 복 된 자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