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3):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51:1-11
예수를 믿는 사람은 부활 신앙으로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행복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즐겁고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막고 방해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인생살이입니다.
첫째,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현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때는 가장 먼저 주님이 내게 행한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는 성도는 주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채석장을 생각해 보라”고 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자갈처럼 흩어져 있는 채석장과 같은 세상에서 죄로 인해 반석같이 굳어 있는 우리들을 택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던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셨습니다.
지금 선지자가 사용하는 이미지는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와 바빌론의 성을 가꾸기 위해 돌을 떠내고있는 채석장에서 그 이미지를 빌려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포로민들이 일하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여호수아 24장 2절에 의하면, 바로 그 자리가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강 저편에 거하는 곳에서 다른 신을 섬기고 있던 갈대아 우르와 정확히 같은 장소입니다. 그 땅이 바로 바벨론 땅입니다.
지금 유다 포로들이 살고 있는 바빌론 땅인 갈대아 우르에서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불렀고, 그에게 한 민족을 이룰 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홀홀 단신으로 세상 속에 그저 돌처럼 묻혀 있던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뽑아내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어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이 형성 되었습니다(2절).
주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이 된 우리들에게도 그 약속이 성취될 것을 소망하도록 “나의구원은 대대에 미칠 것이다”라고 8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3절에서 엉망이 된 나의 모든 삶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 너를 축복하여 황폐한 땅, 너희 직장을, 내 가정을 내 삶을 회복시켜 기쁨과 즐거움이 있게 하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할 것이다.’ 놀라운 약속이지 않습니까!
오랜 고난을 이겨낸 우리들에게 더 확신을 주기 위해 5절에서 구원의 때가 매우 가까웠고 속히가서 구하리라는 약속을 더해주십니다(“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망과 어려운 환경에서도 반드시 나를 위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힘들고 우리의 목을 조여오는 모습을 본문 20절은 ‘그물에 걸린 사슴’(현대인의 성경, 노루: 공동, 영양: 개역, 개정, 새번역)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물에 걸린 짐승을 보셨습니까? 처음에는 자신이 걸렸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며 올무에서 빠져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목을 감은 그물은 더 움직일수록 목을 조여 옵니다. 마지막 죽기 전 숨을 헐떡이는 단계로 접어들 뿐입니다. 이 시간이 조금 지나면 영원히 숲을 볼 수 없고 다시는 동료들과 함께 뛰어 다니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그물에 걸린 사슴’은 비록 바벨론에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소개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다 당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상황입니다. 비록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갖고 있지만 현실이라는 상황에 너무 겁을 먹을 수 있습니다. 고래 고래 살려 달라고 몸부림만 칠 뿐 정작 구해줄 주님에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움직이면 자신의 목만 조여 오기에 좀 더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 몸부림조차 치지 못하고 숨만 지탱해가고 있는 그런 우리의 삶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14절은 우리들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의 한계 상황을 말해줍니다. 질병과 같은 것이 우리의 건강을 결박합니다.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이 개선되거나 진전되지 못하고 늪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런 분들이 여기 있다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은 죽은 글이 아닙니다. 살아있어 오늘도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믿음을 가진 자만이 그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약속이라 부릅니다.
약속은 상대방의 신뢰를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신 분은 우리를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죽음 이후에 있을 모든 것들을 믿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을 갖지 못한다면 어불성설입니다. 주 안에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셋째,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 진정 의지할 대상을 사람으로 선택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절에서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고 말합니다. 진정 의지해야 할 분이 하나님임을 나타내기 위해 5-6, 8절에서 내 공의, 내 구원, 내 팔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7절에서는‘깰지어다’라는 동사가 두 번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분명 깨어나야 할 사람들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왜 그들이 깨어나야만 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의지하는 우리의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7절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비방을 우리는 두려워하고 놀랜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향한 참된 위로자는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 12절에서 “나 곧 나이니라” (I,even I)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자신들을 포로로 삼고 있는 바벨론을 두려워하듯이 우리들 역시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12절에 “풀잎에 불과한 죽을 인간을 두려워하느냐?” 그리고 13절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이유는 바로 눈 앞에서 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포로민들이 가장 고대하고 기대했던 사람은 고레스 왕이었습니다. 그가 바벨론을 침공만 해준다면 그들이 풀려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바램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번 힘만 쓰면 나의 문제가 해결될 텐데 하는 기대감입니다. 그러나 이사야서는 고레스라는 이름이 점점 49장 이후부터 언급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 고레스는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지 회복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과 지식그리고 돈과 권력 모든 것이 인생의 문제를 푸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고백을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삶이 우리를 흔들고 고난이 다가올 때 우리는 쉽게 의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의지할 분을 찾아야 합니다.우리의 피난처 되시며 방패와 산성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분 앞에 엎드려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모든 것의 해답이 되시는 주님! 나의 앞의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시며 바람 앞의 나를 강하게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타협과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부활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은 현실의 비관적 상황을 보며 더 적극적인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제시하는 묵시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우리의 현실에서의 문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들을 억압하고 놓아주지 않은 근본적인 악의 근원을 제거해 달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9절에 “옛날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절에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가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여기서 ‘옛날 시대’는 창조 사건을 말합니다. 그리고 라합과 용은 창조대의 어둠과 혼돈과 공허 그리고 현실을 상징합니다. 이 근원적인 악과 현실의 악을 제거하도록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라고 간구하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간구는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고난 가운데 설 때마다 외쳐야 하는 동일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현실 앞에서 쓰러지지 않고 믿음으로 주의 능력을 간구하듯 우리도 이 시대의 아픔과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서 외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주여 도우소서! 주여 능력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삶이, 우리 시대가 죄의 포로가 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악이 뒤 덮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임하여 주시옵소서! 악의 근원을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친히 해결자가 되어주시고 이 어렵고 힘든 삶에 길을 내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자신들이 걸린 그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 자신이 너무 똑똑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쉽게 ‘안되’, ‘포기해야 될 것 같아’ 라고 스스로 자신이 결정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에 마무리 짓도록 내어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상 속의 현실은 그물과 같습니다. 그물은 우리를 올무에 씌워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은 누군가가 와서 걷어 버리면 사라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우리가 전적으로 의지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현실이라는 세계 속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바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장애물을 걷어 버리시고 완전한 승리를 외치는 분이십니다. 그때를 기다리며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 믿음으로 험한 세상 살이를 승리로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