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2): 한 사람도 소중히 여기십니다.
마18:10-14
오늘은 교회들이 교사주일로 지냅니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성도 모두가 영혼을 책임지며 나아가는 분들이기에 우리 모두가 교사라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도 소홀히 대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주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도가 사람을 소중히 여길 때 어린 아이까지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절에 보면 어린 아이일찌라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깔보지 말고(look down, NIV), 왕따 시키지 말라’는 의미로 들려옵니다. 주님 당시 아이들은 늘 소외 당했습니다. 계수를 할 적에도 여자들과 아이들은 제외 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어른들을 제치고 주님께 나아오자 제자들이 꾸짖는 일이 생겼습니다(마19:13).
그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이 나아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마19:14). 그러면서 그들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 주시곤 했습니다(마19:15).
당시 사람들 눈에는 주님이 어린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이
사뭇 자신들과는 달라 보였을 것입니다. 하찮게 여기고 관심 밖의 존재로 보는 자신들과는 정말 다른 주님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어린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은 일제 시대 때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만들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선각자의 노력이 이런 세상을 만든 것입니다. 그 어른도 중요하지만
주님이 어린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은 아이들까지도 귀하게 여기는데 우리가 어찌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은 나와 말이 되고 저 사람은 나와 말이 안 되기에
세상은 왕따를 만들고 그들을 외면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공동체입니다. 주 안에서 우리는 모두 가족입니다. 공동체는
구별과 차별이 아니라 하나되는 곳입니다. 어떤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친교를 나누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 내에서
소통이 일어나야 합니다. 요즘 ‘소통’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국가 지도자들이나 회사 경영에도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통은 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소통은 ‘길’과 같습니다. 길은 어떤 곳이든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고 가는 것을 소통이라고 부릅니다. 막힘이 없어 서로가 통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복하며 만들어 가는 것을 소통이라 부릅니다.
서로 더 잘 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것마저도 사랑으로 깨뜨리는 공동체입니다. 어린 아이
한 명이라도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에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최고 관심의 대상입니다. 어떤 사람도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구별과 차별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소통이
이루어지는 곳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도를 소중히 여기기 삶은 공동체의 일원들을 모두가
서로 잘 알고 생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12절에서 한 목자를 소개합니다. 그는 100명의 양을 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한 목자가 돌 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양의 수를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양떼를 먹이고 돌아오는 길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빨리 알게 됩니다. 실내도 아니고 야생에서 양을 기르다 보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곳이 ‘산’이라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 곳에 머물던 목자가 양들이 풀을 다 먹자 다른 목초지로 양을
옮기는 과정인듯합니다. 분주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남은 양을 두고 잃은 양을 찾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나머지 양들을 남겨
둔 것으로 보아 이런 모든 형편을 다 고려한 목자이였을 것임을 생각합니다.
이 비유에서 보여주는 목자는 양을 늘 카운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100마리 정도이기에 쉽게 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숙련된 목자임을 보여줍니다. 늘
이동 시에 양떼를 세워 본 경험이 없다면 이처럼 알아 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관심’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늘 사람들을 다 생각하고 돌보지는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우리 공동체의 일원인가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성도의 신앙자세입니다.
코넬한인교회도 조그마한 공동체입니다. 서로가 이름은 알고 지내셔야 합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이름을 외우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고 식사도 하고 성경공부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아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양 한 마리에 관심을 가진
목자처럼 우리 코넬한인교회 성도님들도 새로운 신입생을 맞기 전에 서로가 더 잘 알고 지내기를 바랍니다. 방학
전이라도 원월드룸에 내려가시면 더 많은 분들과 섞여 친교하시기 바랍니다.
어린 사람이 어른에게 인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온 성도가 주 안에서 만나기에 기쁨으로 주일 날 서로 먼저 인사를 나누기를 바랍니다. 교회생활은 믿음의 공동체 생활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부분 화요일과 목요일 여성 성경공부에 참석하시기에 따로 일 년에 한번
심방 기간을 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님들의 가정과 개인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으시면
목회자를 모시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한편, 성도는
주일날 참석을 못하실 경우가 생기면 먼저 교회 리더십들에게 사정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이것도 신앙생활에서
성도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신앙생활입니다. 미리 사정을 알게 되면 여러분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에
자신들이 더 소중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서로가 소중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공동체 모두가
서로를 주 안에서 더 알아가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개인과 가정에 기도제목이 있으면 함께
기도제목을 내놓고 기도하는 성도님이 되실 줄 믿습니다.
셋째, 성도를 소중히 여기는 삶은 길을 잃은 영혼이 있다면 찾아
나서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국민들의 신변의 안전을 위한 나라 중 하나가 이스라엘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국민들이 여행을 하다가 실종될 경우 어떤 비용을 드려서도 시체라도 찾아 가족들에게 돌려 주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아직도 한국이나 월남전에서 죽은 미군들의 시체들을 찾는 작업을 그만두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목자도 99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여러 면에서 반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환경인지 잘 모릅니다. 물론 목자가 99마리 양을 누군가에게 맡기고 갔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만약 다른
목자가 없었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목동들은 노인과 아이들이 함께 양을 친 것을
감안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목자가 99마리의
양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하고 떠났겠습니까?
주님의 비유는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비유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에 맞추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디테일한 것들을 고려 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목적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성도에게 관심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관심과 배려를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고 가야 할 것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중고등부를 담당하던 시절입니다. 학생들에게
주일 예배를 드리기 전에 오랫동안 출석하지 못한 친구들의 집을 찾아가 보는 시간을 마련한 적이 있습니다. 먼 곳에 있는 친구들에게는 전화를 먼저하고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5월에 우리 성도님들이 한번 시도해 볼 것은 교회 등록은
했지만 사정으로 출석이 잘 안 되는 분들을 살펴 보는 것입니다. 목장 별로 목원들이 담당해서 한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교회도 다니지 않는데 주일 날 예배에 오지 못한다면 관심이 가야 할 대상입니다. 격려가 필요합니다. 전도하기 보다 교회에 오셨던 분들을 찾아 나오게
하는 것도 전도의 좋은 전략입니다.
청년들은 이제 방학을 하면 이타카를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더 목원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방학
동안 서먹한 관계들이 더 개선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여행을 한다면 더 좋은 기회입니다. 다른 나라나 다른 장소에서 보내는 소식은 서로 더 정겨움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기혼 분들은 방학이면 그래도 조금은 시간적 여유가
있을 줄 압니다. 공원 같은 야외에서 목원들이 다들 한번 시간을 내어 만나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이제 피킹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안 나오시는 분들께도 연락해서
한 번 함께 해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음식도 준비하고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서로 함께 친교하다
보면 서먹했던 교회에 다시 오는 것도 자연스러워 질 것입니다.
성도는 잃어버린 양들을 알아야 하고 찾아 나서야 합니다.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목자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가가서 그들을 이끌어 와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는 한 생명이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님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12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주님의 의도는 제자들의 생각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도를 전달하려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진정 말씀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접어두고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늘 품고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왕따를 당해본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신의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견이 무시되고 존재감이 사라진다면 정말 그곳에 머물기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님을 안다면 우리는 왜 공동체에서 한 사람을 잃어버리게
되는지에 대해 철저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그 장본인이 될 수 있다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겸손이고 다른 사람을 더 소중하게 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영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아니라 목장 목원들, 찬양대원들의
기도제목이 정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장 모임을 할 때 기도제목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어려움은 도움을 요청하고 기쁜 일은 기뻐하고 감사하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한 영혼을 찾아 나서는 것은 직접 만나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특별히
목장지기님들과 앞으로 세워지게 될 장로님들은 성도들의 삶의 기도제목을 나누시고 기도하시는 분이 되실 줄 믿습니다.
특별히 교회 리더 되시는 분들, 섬김위나 목장지기님들, 부서 팀장님들은 내가 만나는 분들의 기도제목을
정리해서 함께 나누는 것을 게으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목회자에게 기도제목을 나누어 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가 있는 것을 더 빨리 알고, 더
빨리 찾아보고, 함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공동체 모임에 함께 하지 못하는 분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다가가야 할 분이 바로 장로님들이고 앞으로 세워지게 될 권사님들입니다. 지금은
우리 교회에 권사님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목회자로서 개인적인 소원은 장로님들이 세워지고 난 뒤 권사님들도
세워지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성도의 아픔에 기도하는 분으로 위로를 가져가는 권사님들이
교회에서 있어서 늘 사랑이 충만하고 나눔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한 영혼을 소중히 하고 한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믿음의
공동체로 우리 교회가 세워져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제부터라도 나 아닌 다른 한 분에게
더 관심을 갖는 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