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1): 생존만을 위해 살지 마세요
왕상 17:1-9, 17-24
지난 학기를 보내면서 교회와 세상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부분들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적 세계관’이란 제목으로 방학 동안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이 땅에 사는 성도는 생존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는 중요한 성경적 가치관을 묵상 하고자 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다윗과 솔로몬이 죽고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라가 나누어 지게 됩니다. 초창기부터 북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본문의 배경까지는 4번(전체 9번)의 혼란스런 왕조 교체가 이루어집니다. 1절을 보면 이런 시기에 가장 악한 왕으로 알려진 아합이 나라를 다스릴 때하나님은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신앙에 대한 박해가 매우 강했음을 18:4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을 중심으로 여호와 신앙을 가진 선지자들을 공식적으로 죽이는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야도 왕의 비호를 받는 바알 선지지들을 피해 그릿 시냇가로 숨게 됩니다.
믿는 성도는 생존만을 위해 산다면 삶이 어려울 때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존만을 위해 먹이를 찾는 늑대의 삶이 아니라 먹이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닥치는 위험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늘 우리를 먹이고 입히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생존에 대한 가장 우선적인 성경적 가치관으로 품어야 할 것은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는 기적적인 모습은 생존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약속의 보장입니다. 어떤 극한 상황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생각하십니다. 비록 하루 세 끼가 아닌 아침과 저녁에만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의 양은 작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런 환경에도 넉넉히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는 어떤 극한 상황에도 하나님이 살리신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생존의 위기 속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체험하게 됩니다. 생존 훈련을 잘 마친 엘리야는 이제 세상속으로 다시 파송 받는 모습이 9절에 나타납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받은 훈련은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훈련을 먼저 받고 그대로 살아가도록 세상을 향해 보내집니다.
엘리야는 당시 세상의 대명사로 알려진 시돈에서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는 한 과부를 만나게 됩니다. 시돈은 당시 바알 신앙이 가장 왕성했고 바알 신앙을 국가 종교로 만들었던 아합 왕의 아내인 이세벨이 시집 온 곳입니다(16:31).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를 반대로 그곳으로 보내십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하나님이십니까? 이스라엘에서는 이세벨이 가져온 바알 신을 섬기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람은 바알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기게 된 이유는 결혼동맹을 통해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고 볼 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세벨을 아내로 삼을 때 의도적으로 그녀와 함께 바알 선지자들을 데리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18:19절에서 보여주는 바알 선지자들이 450명이 넘는 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아합 왕은 왜 이런 시도를 했을까요? 아합의 심중에는 이스라엘의 생존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습니다. 어떻게 들리면 멋있게 들리고 노벨 평화상 후보로 부상될 것 같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의도는 너무나도 불손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다양한 신에 의존함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합리적인 생존의 선택이었습니다.
아합의 태도는명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의 신으로 가뭄과 기근에는 무용지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은 강우량이 적어 비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살 수 있는 대처 방안이 무엇이겠습니까? 아합 왕은 폭풍과 비를 관장하는 바알 신이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현실에 대한 적절한 반응과 합리적인 생각이 타협으로 결론지어집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 비를 허용하지 않는 다면 다른 신에게 간청하여 비를 오게 할 수 있다는 일종의 혼합적 신앙의 발상입니다.
결국 생존만을 위한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목숨 만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게 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성경적 세계관은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내는 어떤 합리적인 사고들도 하나님을 떠날 때는 ‘타락’으로 규정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에 대한 혼합적 신앙은 포용이고 더 큰 이해이며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의 소리와는 너무나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드디어 엘리야는 한 과부를 시돈의 사르밧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도 가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래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이스라엘의 북부 국경인 시돈 역시 가뭄으로 매우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참 아이러니입니다. 폭풍의 신 바알을 섬기는 시돈은 늘 풍요로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곳 사람들도 가뭄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남편도 없이 자식을 키우는 여인으로서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바알의 가짜 모습을 보도록 하기 위해 엘리야를 그곳으로 파송했던 것 입니다.
여인의 절망적인 사정이 12절 이후에 소개됩니다. 이 여인이 가진 전부는 한 움큼의 빵 가루와 병에 남은 기름 조금 뿐입니다. 얼마나 적은 양이면 빵을 구울 때 필요한 땔감이 두 서너 개의 나무 가지로 충분할 정도였습니다. 이 여인이야말로 생존의 기로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다는 상황만으로 죽을 것을 결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항상 이런 결론으로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해도 안되, 더 이상수가 안 보여.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어. 이제는 내가 감당할 수 없어. 그러므로 포기할 거야.” 뭐 이런 것이 우리 인간의 생존에 대한 세상적 가치관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도 스스로 끊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밑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내가 소유하는 모든 것은 내가 주인이다’ 라는 사상입니다. 이것이 지금 이 시대의 정신적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성경적 가치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알려줍니다. 모든 존재의 실제 주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온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 인생을 사는 것은 어쩌면 가장 기본중의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해야 하는 마지막 최선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전달되는 세 번째 성경적 세계관은 생존에 대한 최선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최선’은 인간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다 발휘하고 난 뒤에 반드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까지 가야만 그것이 최선이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을 세상에 가르치기 위해 엘리야를 보냈습니다. 최선의 의미를 모르고 자기 스스로 포기하고 생명조차 끊으려 하는 인생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 됩니다. 14절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소. ‘나 여호와가 이 땅에 비를 내리기까지 그 항아리의 밀가루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보다 더좋은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는 소리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여인은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을 그대로 믿을 때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은 실제로 전쟁에서, 가난에서, 위험에서 건져내는 직접적인 삶과 하나님의 구원을 연결 시키고 있습니다. 세상의 실제적 위기로부터 구원을 경험하는 기쁨이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의 기쁨으로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기복적인 세상 종교와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고, 전쟁에서 피하고, 먹을 것이 생기는 그런 정도의 구원을 말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한 가지 사건을 더 17절 이후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근에서도 살아난 과부의 아들이 갑자기 죽는 일이 생깁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관심을 보여야 할 곳은 18절입니다. 과부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이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집에 거하면서 그녀에게 자신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그 죄를 인식하는 순간 아마 아들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듯 합니다.
하나님은 이 여인의 가족을 먹여 살리려 선지자를 보냈지만 그녀에게 단지 생존을 넘어선 문제를 해결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선지자가 그 집에 머무는 동안 그녀를 괴롭힌 것은 그녀의 죄 문제였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죄가 그녀를 괴롭혔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두 가지를 상상해 봅니다.
하나는, 종교적으로 시돈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에 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고대사회에서 남편 없이 어린 자식 키우는 여인이 살아갈 방법은 오직 매춘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죄를 지적했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선지자의 방문은 그녀의 심중을 마구 뒤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은혜가 더해 집니다. 그 집의 아들이 갑자기 죽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많은 것을 생략하고 말씀 드리지만 이 사건을 통해 여인은 죽음을 생각하게 하고 죽음 너머의 하나님의 통치를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존에 대한 마지막 성경적 세계관은 이 땅에서 먹고 사는 생명유지 차원을 뛰어넘어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갖는 깊은 관계의 중요성과 인생을 드디어 마칠 때 죽음 너머의 문제를 해결하라고 도전합니다.
이 여인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24절에.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 무엇이 진실이라는 것입니까? 우리 인생이 그냥 잘 먹고, 내가 원하는 것 하는 것 외에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것이 ‘맞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힘들어도, 내가 싫어도, 삶이 나를 괴롭게 할지라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야 인생 너머의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제대로 된 영원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인생. 성도의 교제는 언제든지 기분 나쁘면 끊을 수 있을 만큼 만 교회에 발을 디디고 생활하는 교회생활. 자기 목표 만을 위해 달려 가야만 하는 삶. 이런 분들 자신들의 꿈은 이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믿는 사람보다 더 잘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러움의 대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삶이 힘들어도, 교회 성도와의 관계가 어려워도, 심지어 교회가 싫어도 주님 붙잡고 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생긴 오해가 있다면 풀고, 서로 돕고, 어려운 것 이해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싫고, 저래서 주님 떠나고, 그래서 하나님 믿기도 싫다고 하면 하나님이 잘 했다고 칭찬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변명에 불과합니다. 심판 때에 봐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말씀대로 못 사는 분은 심판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당장의 문제이며, 이미 구원 받은 성도에게는 지금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현재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세상에서 더 잘 되고, 더 많이 가지고, 너 높은 곳이 아니라 현재 주신 자리에서 그리고 앞으로 주실 위치에서 어떻게 더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리며 사느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내가 복된 사람이다’ 라는 흔들리지 않는 성경적 세계관을 선포하며 사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