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4): 영향력 있는 성도가 되길 바라십니다  

23:1-13

 


오늘은 코넬 졸업식이 있는 날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세상으로 나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각자의 위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진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첫째, 세상이 주는 자리에 앉는다고 모두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선한 영향력은 내가 가지고 있는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모세의 자리는 그 당시 사회에서 최고의 명예와 존귀함을 받는 위치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맡은 자들로서 백성들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삶의 기준을 제시하여 공동체의 가치관을 형성해 나갑니다. 공동체의 윤리와 도덕을 세워나가는 리더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때로 율법에 대한 다른 해석을 가질 때 그들의 판단이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제시하는 해석은 전통이 되어 다음 세대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주님은 13절에서  ‘위선자들이며 그들에게 화가 있다고 까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세상적인 위치와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과는 별개의 것임을 보게 됩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타임지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을 5개 분야에 걸쳐 4월에 발표했습니다. 많은 아시아 정치 지도자들이 언급되었지만 한국 정치 지도자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김정은 예외).

 

반면에 푸드업계에 바람을 일으킨 한국계 로이 최씨가 개척자 분야에 선정 되었습니다. 그는 72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도박 중독 등 방황의 시간도 보냅니다. 26살에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푸드트럭이 그의 인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가 제시한 사업형태는 많은 요리사들에게 소액투자의 좋은 모델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소셜미디어를 마케팅에 활용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시장 불모지에 양질의 음식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지역 청년들에게 일자리 창출이라는 공헌이 그가 선정된 이유라고 합니다. 그의 삶이 작년 1월에 나온 영화 아메리칸 세프에서는 이민자로서 미국의 삶과 푸드트럭의 이야기가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은 세상에서 내가 차지한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많은 이웃들에게 행복을 주고 도움이 되는 삶의 자세에서 나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모든 믿는 성도는 내가 선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임을 기억하며 살아나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선한 영향력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권위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성도가 세상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권위가 보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위적인 모습만 보였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으로부터 그들이 책망 받는 이유입니다.

 

권위적인 모습이5절에서 소개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성경 구절을 양피지에 적어 작은 사각형 상자에 넣고 긴 가죽 끈으로 왼쪽 손목에 매고 다녔습니다. 이마에는 네 개의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묶고 다녔다고 합니다. 머리는 율법을 늘 생각하고 심장에 가까운 왼손은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게다가 민15:37-41절에 의하면 율법을 항상 기억할 목적으로 외투 옷단 네 귀퉁이에 술을 만들어 달았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더 많이 알고 율법에 대한 열정을 표시하기 위해 옷술과 끈을 넓고 크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타인들에게 드러내기를 원하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게다가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만히 있어도 타인들에 의해서 중요한 사람들임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과시하고픈 것이 권위주위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당이나 잔치 어디든지 그들은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6).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항상 인사 받기를 좋아합니다.

 

자신들을 보고도 인사하지 않거나 높은 자리에 앉히지 않는다면 어떤 행동들을 그들은 했을까요? 회당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를 초대해서 율법을 가르치는 회당장에게 사소한 율법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를 곤란에 빠뜨리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잔치 집에 초대를 받았지만 그곳에서 하대를 받았다면 그날 주인에게 뭔가 잔치에서 율법에 어긋나는 것들이 보인다는 트집을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저자 거리에서 누군가 실수로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칠 경우에도(7)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고 랍비라고 부르지 않는 경우도(8) 있었을 것입니다. 어른들은 그들을 잘 알아보고 선생이라고 인사하지만 아이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잘 갖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율법을 많이 안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을 야단치고 누르는 강압적인 자세를 취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여러분이 선 위치에서 스스로 나 자신이 권위를 드러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지 않아도 남들이 권위를 인정해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많은 것을 알고 경험했기에 당신들과 다르다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강조하는 권위적인 태도가 있다면 오늘 우리 모두가 버리는 날이 될 줄 믿습니다.  


셋째,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하고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을 보면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만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그들은 본이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본이 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다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정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 더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입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율법을 지키고 행동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율법에 기록되지 않는 십일조까지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조항과 행동이 거의 일치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해야 옳습니다(참조 마 5: 20).

 

그런데 왜 주님은 3절하반절에 보면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실까요? 이 말의 의미는 일단 613개나 되는 율법 그 자체는 잘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23절 말씀처럼, 정의와 공평, 사랑과 믿음인 율법의 정신은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남을 돕고 헌금도 하지만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단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리고 드러내기 위한 모습뿐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라는 말은 그들이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기에 무엇이든지 행하고 지켜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말은 613개의 율법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삶에서 실천하지 못하는 그들의 외식하는 모습은 따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만 말하고 그 율법 속에 담겨진 사랑은 실천하지 못하는 빈 껍데기라는 비난을 주님께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반응해야 맞는 것입니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은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라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칭찬받도록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정상인데 더 이상 칭찬을 받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것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우리를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그렇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은 그저 정상적으로 하는 것뿐입니다.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상석에 앉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실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실 여기 계시는 분들 가운데 사람들이 나를 높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는 데 거절할 분 몇 분이나 있을까요? 사람들이 존경한다고 말하며 칭찬하는데 누가 그 칭찬 듣기를 거절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칭찬을 은근히 즐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는 것을 떠밀리며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은 이런 유혹이 있을 때 간단히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선한 영향력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실제로 그들을 변하게 만듭니다.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그들은 선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자들이라고 질책하십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사람들에게 행할 수 없는 것을 자꾸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외울 수도 없는 엄청난 613개의 율법을 다 지키도록 강요했습니다. 그 외에도 자신들이 만든 것을 자꾸만 짐으로 더해갔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나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는 좌절감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지켜지지 않는 방향으로 온 공동체가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15).

 

사실 3절에서 바리새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도 맞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최선을 다해서 율법을 다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못하는 것도 분명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못하면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못했기에 결과는 율법을 다 지키지 않은 것이 진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 지키는 자로 보이기 위해 못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남들보다 더 하는 것을 보여서 율법을 다 지키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외식이라 불렀습니다. 위선은 사람들을 바꿀 수 없습니다. 자신들도 할 수 없기에 위선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선으로 남을 바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만이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8절에서는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성품을 가르치는 선생은 오직 한 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9절에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분은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그리고 10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율법을 뛰어넘어 하나님께로 인도해 나갈 수 있는 지도자임십니다와 같은 겸손한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서기만하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겸손은 실제로 사람들을 바꿀 수 있게 됩니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의 진정한 겸손은 섬김이 지속될 때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몇 주만, 일 년만 하지 말고 주님 오실 때까지 겸손의 자리에 늘 서기 바랍니다.

 

섬김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는 것 이미 알고 있습니다(12). 섬김이 사람들을 바꿀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주신 힘으로 섬기고 낮아지는 훈련이 안 되면 세상에서도 선한 영향력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하는 지혜와 능력으로 여러분이 선 자리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