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5): 치유자 되십니다
마태복음4:
23-25
졸업을 마치니 코넬이 정말 방학 기분이 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한 시리즈를 통해 내가 믿는 주님에 대해 좀더 깊이 있게 알아가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한 사건을 집중하기보다 마태복음 전체를 통해 치유하시는 주님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치유하는 장면이12개가 언급됩니다. 8장과 9장에 9개의 치유사건이 집중 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3개는 흩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구성을 시도한 마태의 의도가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2장까지 다룬 후에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
3장에서 세례 받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4장에서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고 승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부르면서 사역이 시작됩니다. 마태는 특별히 주님의 공생애 전 사역을 일목요연하게 4:23절 한
구절에서 ‘가르치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다’ 라는 3가지
동사로 간략히 소개합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주님의 가르침인 산상보훈이 가장 먼저 나오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8장 1절에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로 시작합니다. 그 후부터 주님의 치유하는 장면이 계속 9장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가르치고 다음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십자가를 지는 순서로 사역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가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가장 잘 소개하는 방법을 선택하다 보니 이런 구성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보 안에 있는 자료에 의하면, 치유는 예수님이 복음 사역을 위해 움직이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각각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어느 장소, 어느 때를 막론하고
병들어 아파하는 일들이 사람 가운데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치유가 일어났다는 것은 병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 주님을 찾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12개의 사건에서 3개의
경우가 본인들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직접 나아옵니다. 그들은 병들어 있습니다. 의사들로부터 고칠 수 없다는 난치병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여인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함께 살 수 없었고 철저히 격리된 삶을 살았던 환자도 있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이 병을
고친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찾아옵니다.
이들이 어떻게 주님을 찾아왔겠습니까? 사회생활이 제한되고 사람들과 교제가 끊어져 있던 그들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치유의 가능성을 믿고 주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성도가 질병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의사가 고칠 수 없는 병이라도 주님은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을 들려
주는 것입니다. 이 선포가 있을 때 환자들은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예수께 나아가게 됩니다.
앞으로 세워지게 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은 다른 경우는
몰라도 반드시 병자들의 심방에 목사님과 함께 동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5:14절에 ‘병자들이 있거든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게 하십니다. 성도님들은 본인이나 가족들 중에 누가 아프시면 목장지기에게
알려 목회자가 가서 기도할 수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말씀대로 하면 말씀대로 치유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 고침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천년 전이나 지금도 본인이 아픈 분도 있지만 가족들
가운데도 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더 가슴 아픈 일은 자신도 모르게 사고가 나고 그것으로
고칠 수 없다는 아픔을 듣게 되는 경우입니다. 게다가 이유도 모르는 병에 걸려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일들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고치는 병명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나병, 중풍, 열병, 혈루병, 소경, 손 오그라진
것 등이 보입니다. 물론 현대의학으로 고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 불치병들로 알려져 있던 것입니다. 우주를 여행하고 인간 DNA 지도가 만들어지는 세상에 살아도 여전히 고칠 수 없는 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 안에서 기적은 일어 난다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천년 전에도 의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병자들은 치유 받기 위해 명의들을 찾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혈루병
앓는 여인은 12년 동안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물론 그
여인이 가난한 여인인지 부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있어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돈이 있던 없던 자녀가 병을 앓고 있다면 고쳐 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만약 시집을 가기 전에 이 병을 앓고 있었다면 결혼
생활은 거의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렇다며 이 여인은 혼자 살아가는 여인일 것입니다. 아니면 시집 간 후에 이 병을 얻게 되었다면 남편도 아내를 치유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어 혼자 살게 된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병을 가진 분들이 당하는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즐길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긴 세월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이런 병명을 가진
환자들이 홀로 군중들 틈을 타서 접근한다는 것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대낮의 더운 날씨는
더욱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침상에 누워 누군가의 도움으로 왔습니다. 본인이 정말 올 수 없어서 주인이 와서 하인의 병 고쳐 주기를 청하기도 합니다. 혈루병 여인은 너무 어지러워 기어와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 왔을까요? 치유함을 바라는
분들은 병 낫기를 원하는 간절함 때문에 주님께 나아오긴 하지만 반드시 주께 오는 사람들의 심중에는 ‘내가
지금 앓고 있는 병이 어떤 병이든 상관없이 예수만 만나면 병이 낫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2가지 경우를 보면 본인 아니면 타인에 의해서 주님께
옵니다. 놀랍게도 본인이 직접 오는 경우는 3번인 반면 타인에
의해 나오는 경우는 6번이나 됩니다. 부모가 3 번으로 가장 많고,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도움으로 나오는 경우가 2번이고 특이하게 주인이 그를 위해 주님께 나아오는 경우가 1 번
있습니다.
가장 간절히 병 고침을 낫기를 바라는 분들이 자녀를
가진 부모들임을 보여줍니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갑자기 열이 나거나 복통으로 아파하면 부모가 더 안절부절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서 누어있으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자녀들이 아프면 가장 심하게 아픔이 부모에게 전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가정에 어떤 아픔들이나 슬픔, 특히 병이 생길 경우 먼저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께 나아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특히 부모님 되시는 분들은 아이들이
아플 경우 그 자리에서 부부가 손을 잡고 먼저 기도하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분들이 있으면 주님께로
이끌어 오셔야 합니다. 9장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자신이 거동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경우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들것에 들고 환자를 주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남의
일입니다. 내 아픔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들은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남을 위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남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알고 나의 희생을 드려 주께로 데리고 올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특히 타인들과 함께 온 6개의 경우를 보면 대부분 아픈 사람이 직접 나올 수 없는 경우입니다. 두
사람이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합니다. 반드시 누군가 도움이 필요합니다(8,
9장). 그리고 세 가지 경우가 영적으로 귀신들린 자들입니다. 이들은 본인 스스로 주님을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이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아프지만 교회를 찾기가 힘들고 주님을 알지 못해 찾기가 힘드신 분들이 주위에 있을 것입니다. 이때에는 성도님들이 협력해서라도 그분을 주님께 데리고 나와야 합니다. 특별히
우울증과 불면증 환자들은 교회에 나와 친교하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성도님들이 도움의 주인공이 반드시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특히 아프신 분들은 주님을 만나기가 참 좋습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지만
몸이 아프고 마음이 힘들 때 주님을 만나고 영접하기 참 좋은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변에 그런 분들이
계시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들을 찾아가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아픈 분들을 바라볼 때 성도는
그들을 향해 주님이 품었던 것과 같은 동일한 동정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돕는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병자들을 교회에 데려오기만 하면 다 고칠 수 있습니까? 예수를 만나면
다 났습니까? 심방해서 손을 얹고 기도하면 낫나요? 물론
기대했던 일이 안 일어 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도 데리고 온 귀신들린 병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그 의미를 조금 뒤 살펴 보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믿지 않는 아프신 분들이 일단 주님을 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다는
즐거움입니다. 많은 간증을 듣다 보면 ‘병이 나서 오히려
감사했다’는 고백입니다. 병이 없었다면 자신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간증을 한 번씩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심지어 치유를 못해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아픔을 통해 온 가족이 예수 믿는 가정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고백을 남기는 분들도 많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육신의 병이 낫는 것보다
더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이 치유하는 장면 가운데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사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이유는 가족들에게 다시 만나는 기쁨을 주는 것 이상의 복이 있습니다. 그가 예수를 알고 죽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우리 영이 살지 못하면 가장 큰 병을 고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병 고치는 현장에서 들리는 특이한 두 가지
소리가 있습니다. 병을 고치기 전에 환자에게 주님은 질문합니다. “내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느냐?” 물론 모든 사람에게 다 물은 것은 아닙니다. 분명 어떤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위해 믿음을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다른 특이한 소리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오해하는 것은 ‘모든 질병은 죄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기서 의도하는 바는 병만 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오게 만들었던 근본적인
인간의 죄 문제를 그에게서 용서하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주님의 치유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억할 것은
인간의 가장 큰 병은 난치병도 불치병도 아닌 바로 죽음이며 그 죽음의 병을 치유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입니다.
죽음이 인간의 가장 큰 병이 되는 이유는 사망 때문입니다. 사망은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허락되지 않는 곳이 지옥입니다. 죄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은 주님이 죄 문제의 해결자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마태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치유사역에 포함시켰던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주님이 사망에서 우리를 건질 구원자 되심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가장 악한 질병인 죽음을 고치는 치유자 되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음이 치유되면 모든 병은 고쳐진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병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주 안에서 모든 병이 치유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부활입니다.
나중 성도의 부활이 이것을 증명해 줄 것을 믿는 복된 분들이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