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세계관(2): 위기에서 하나님을 드러내십시오
왕상 18:1-20
오늘은 삶에서 만나는 위기에서 어떻게 성도가 하나님을 인정하며 위기를 풀어갈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속의 북이스라엘은 지속되는 가뭄으로 인해 국가 존속의 위기마저 느끼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왕상 17:1절에 의하면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비는 물론 이슬조차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슬조차도 없다면 극한 가뭄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입니다.
북이스라엘 전역은 삼 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드디어 왕이 직접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모습이 5절입니다. 왕의 노력은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나라 전체에 물의 근원이 말라버려 가축을 먹일 풀이라도 찾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신하와 단지 두 사람만이 물을 찾아 나가는 이유는 이미 다른 신하들은 모두 물을 찾는 일에 동원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삶 가운데 직면하게 되는 큰 위기는 어쩌면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위기는 인간의 한계를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때보다 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아합 왕은 이 위기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에 실패합니다.왜냐하면 아합은 지금 처한 국가 위기상황의 원인을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하나님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가장 간단한 접근조차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먼저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예배가 체질화 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예배자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주어진 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상황을 허락한 것임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려는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합의 전 생애를 살펴보아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자의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 안타까움이 발견 됩니다.
예배자로 출발을 한 사람들은 이제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본격적인 원인 분석의 과정으로 들어갑니다. 이때 최선을 다할 것은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집중 해야합니다. 이 절차 가운데 성도가 가장 고려해야 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문제의 근원을 찾아 살피는 시간을 반드시 더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아합 왕은 위기의 원인을 눈에 보이는 것에서만 찾게 됩니다. 그는 엘리야가 3년 전에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17:1절에서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있지 아니하리라.”
‘엘리야라는 사람이 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다’는 것이 아합 왕의 단순한 판단입니다. 세상적인 논리며 접근법입니다. 엘리야 역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입에 둔 말은 자신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주신 분이 계십니다(18:1). 사실 아합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를 무조건 찾아 다시 그가 좋은 말을 하기만 하면 문제가 풀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이 원인을 분석하고 답을 찾는 방식입니다. 어리석음을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들에서만 원인을 묻고 답을 찾으려는 세상적인 태도나 접근법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아합 왕이 얼마나 열심히 엘리야를 찾아 다녔는가를 보여줍니다. 신하들을 각 지파들과 주변 각 나라까지도 보내 그를 찾게 만들었습니다. 무조건 엘리야를 찾아 왕 앞에 데려 오라는 명령입니다. 절대권력 앞에 그 어느 누구도 대항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를 숨게 명령합니다(17:2,3,8). 단지 생명을 유지하는 방책이 아니라 사람들 보다 더 높은 분의 말씀을 따르고, 왕보다 더 높은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장소까지 옮겨 다니며 찾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필요하면 엘리야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이끌고 갔다고 1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두 번째 방법은 단순히 사람들이 찾는 원인에만 머무르지 말고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위기의 원인에 대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묵상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음은 묵상을 통해 절대 절명의 위기가 왜 찾아왔는지에 대한 근원을 찾았다면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성도의 삶에서도 이런 작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내가 어디서부터 근원적으로 문제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파생된 큰 죄들이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되돌아 보는 작업이 바로 회개의 과정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돈과 결혼동맹을 통해 바알 종교의 국교화가 심각한 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고 그 답을 푸는 과정입니다. 왜 다른 나라들과 그들의 신들을 제치고 시돈을 선택해야 했던 이유를 살피는 것입니다.
고대 국가는 신들의 전쟁으로 강한 신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당시 강대국 중의 하나인 애굽과(14:25) 동맹을 맺으며 애굽의 신을 섬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남유다가 가운데 가로 막고 있어 동맹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편, 애굽과 동맹을 맺지 않으려고 했던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남과 북으로 왕조가 나누어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솔로몬 이후 북 이스라엘 왕조를 세운 여로보암은 애굽의 매력적인 신의 힘을 빌렸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는 남북으로 갈라졌지만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하나였습니다. 매년 절기 때마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유다의 성전에 예배를 드리려 내려 가곤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북이스라엘의 경제적 부의 유실이 엄청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한 가지 꾀를 냅니다. 여호와 신앙을 지켜오던 벧엘과 단이라는 지역에 출애굽 때 광야에서 섬겨본 적이 있는 애굽의 신, 금송아지를 만듭니다(왕상 12:27-29). 그러나 신실한 여호와 신앙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이런 행위를 보면서 아예 짐을 싸고 유다로 내려가 버립니다(12:31). 애굽의 신이 북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자신의 앞선 왕이 실패한 애굽 신을 다시 가져오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한편 동편의 강대국인 아람제국은(왕상 15:18) 남유다와 이미 오래전에 동맹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미 자신들과 적국인 남유다가 동맹을 맺은 아람의 신을 섬기는 것은 뭔가 어색합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다 고려할 때 가장 현실적인 답이 바로 시돈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정치, 경제, 종교, 군사 분야에서 약세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을 시돈에서 발견합니다. 더구나 고질적인 이스라엘의 가뭄도 비와 폭풍의 신으로 알려진 바알을 통해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접근방식이 내린 해결책이었습니다.
사실 전쟁은 사람 힘으로 군사력을 키우면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 여호와의 의존성은 떨어지게 됩니다. 군사적 문제보다 더 큰 위협은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었습니다. 천재지변은인간이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국가적 재앙의 난제를 푸는 해결책을 하나님 아닌 것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생존 문제였던 3년의 가뭄 사건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주어진 결과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갈멜산 시합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들의 자기 합리화는 사망이라는 도식을 제시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세번째 방법은 인간적인 논리를 하나님의 생각으로 무력화시키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세상에 결론으로 제시하는 영성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항상 이윤이 있는 곳에 관심을 모읍니다. 생존 문제를 풀고 번영을 가져다 주는 신이라면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더 많은 죄를 낳고 악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북이스라엘은 결혼동맹으로 들어온 바알숭배 사상은 완전히 여호와 신앙을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바알 신전을 짓고, 백성들로 하여금 강제로 바알을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왕상 16:31-33). 점점 더 자신들의 약점을 숨기도록 선지자들을 죽이는데 까지 가는 악을 저질렀던 것입니다(18:4).
군사적으로 약한 북이스라엘이 단지 살기 위해 시돈과의 연합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외된 인간의 선택은 항상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역사는 보여줍니다. 성도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가는 과정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를 미루거나 의도적으로 안 할 때 ‘징계’의 과정인 ‘고난’이 부여됩니다. 이 고난마저 심각하게 거부할 때는 마지막으로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아합 왕조는 예후에 의해 사라지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이고 바른 선택처럼 보이는 결론의 이면에 슬며시 들어오는 죄를 볼 수 있는 영성이 반드시 성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결정은 결국 이성의 합리화라는 인본주의에 기초합니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눈에 보이는 이익만을 고려하여 결정이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미신처럼 여기고 자신들의 합리성을 내세웁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만 문제를 풀어가려 합니다. 그 이성의 극점은 자신과 같은 다른 사람들의 생명조차도 무시하는 무서운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자신들을 반대할 경우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반이성적 태도입니다.
인류의 역사상 20세기에 나타난 스탈린주의, 파시즘, 나찌즘, 군국주의, 전체주의, 반민주주의적 사상들이었습니다.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며 신을 부정하고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부르짖었던 사상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드러나는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리려는 21세기의 사상들인, 포스터모든니즘, 상대주의, 철학적 다윈주의, 종교혼합주의, 동성애 등이 정신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19절이 최종적 답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마지막 방법은 실제로 적들과 한판 세상 한 가운데서 부딪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세상 가운데 크리스천이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혼자 유의자적하며 사는 그런 신앙이 아닙니다. 전쟁 터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군사로 늘 훈련 받게 하십니다. 이때 엘리야처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드림에 요구되는 것은 담대함입니다. 담대함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24절).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때 세상으로 한 발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하나님 되심을 스스로 나타내 보입니다(36, 38절).
모두 굴복하고 무너질 때 엘리야 처럼(22절) 단 한 사람만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홀로 서서 외로움을 감당하는 담대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그런 성도님들이 되기 바랍니다. 위기 속에서 성도가 하나님을 드러낼 때 세상은 무릎을 꿇고 스스로 39절처럼 ‘여호와는 하나님이십니다’ 라는 고백들을 쏟아놓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