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16): 영적 전쟁을 선포하십니다   

10: 34-39

 

마태복음 10장 전체는 제자들을 전도자로 훈련시키기 위해 세상으로 보내면서 말씀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세상에 복음이 전해질 때 일어나는 영적인 것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복음이 세상에 전파될 때 세상과 격렬한 싸움이 있을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4절 말씀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가르치신 것들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마 5:9절은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전쟁보다는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또 요 14:27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어찌 을 주신다는 반대의 소리를 하시는 것일까요? 검은 싸움이고 투쟁이고 서로간의 불화이며 상처와 근심과 걱정을 가져오는 것인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요 14:27의 평안을 이해하면 산상보훈에서의 화평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됩니다.

 

14:27절에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평안)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 의미는 결국 주 안에서 누릴 영적 평안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라는 의미도 영적 의미로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주님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림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 5:9절의 의미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의 관계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1:20-22 말씀,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라는 말씀이 이것을 잘 설명해 줍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이제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주님의 대속하심으로 우리가 다시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죄인 된 사람들 사이에 화평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화평과 평화와는 다른 것임을 먼저 이해해야만 오늘 본문의 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검을 준다는 말은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할 때 치르게 되는 격렬한 영적 싸움을 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6:11,17). 영적 전쟁이 선포된 것입니다.

 

둘째, 그 격렬한 영적 싸움의 대상들이 안타깝게도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 우리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35-36).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될 때 가정에서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1:11).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 가운데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안타까움입니다. 이것이 영적 싸움의 현실입니다.

 

복음은 어둠을 물리치는 빛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이 이 땅의 악을 드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노출되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자신의 허물과 죄를 비추는 빛 앞에 굴복하고 나아갈 때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둠 속으로 더 깊이 자신을 숨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의 영적 전쟁의 모습입니다.

 

이 땅에서 맺어진 육신적인 가족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맞습니다 서로 아껴주고 위로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내 사랑하는 가족도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개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존재이기도 합니다. 가족 이전에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이 왔을 때 가족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심판대 앞에 서는 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임과 죽음 이후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존재라는 사실이 더 무게 있게 다루어야 할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것을 무시합니다. 알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는 자아를 더 강조합니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더 집착하게 만듭니다. ‘도 인간이 깨달음 가운데 만들어진 개념으로 돌려 버리는 교육을 받습니다(명상 법). 최고의 지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고작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미생물입니다.

 

미생물은 미생물로 존재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모든 것들은 선재 하는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런 사고들과 주장들에 대해 논쟁도 하고 싸움을 벌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허무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는 영적 존재와 싸워야 합니다. 그 실체가 바로 공중권세 잡은 사탄입니다

 

사탄과 그 권세 아래 있는 자들과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늘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화평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의 습성입니다. 진리는 투쟁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들에게 지지 않는 것이기에 싸우는 것입니다. 불신과 거짓, 악과 싸우는 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셋째, 영적 전쟁은 우리에게 진리만을 고집하는 바른 선택만을 요구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선택할 때에만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네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과 딸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어떤 것들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결정이 자식들이 중심 되어, 자식을 위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한편, 우리의 부모님들은 최고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 어떤 귄위보다 부모님의 권위가 가장 최종적인 것임을 배우며 자랍니다. 그러나 아비나 어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분이 계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나 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에게 틀렸다, 잘못되었다, 해 줄 수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녀들에게 그들이 바래는 것이 말씀에 위배될 때 거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자녀들이나 부모들이나 어떤 사람도 하나님 위에 설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들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모님이 안 계시면 우리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지 않았다면 어미의 배에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이렇게 선포됩니다. 100:3편은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생명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입니다. 세상에는 불행하게도 이 진리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고 팔고 마음대로 죽일 수 있고 생명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략시켜 버렸습니다.  

 

생명을 주신 분을 무시하는 삶은 최고의 불행이기에 진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영적 전쟁은 서로 피 흘리는 전쟁이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 말씀 중 어떤 것을 더 권위 있는 것으로 두느냐의 선택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세상을 사람은 사랑하기도 하고 가장 두려워합니다. 세상은 육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육체에 온통 관심을 두고 아름답게 치장하고 더 예뻐지려고 모든 것을 투자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편, 세상은 몸을 죽이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 10: 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전쟁은 탁월한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은 지식도 아니고 경험도 아닌 오직 믿음만으로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선택하기에 비록 순간의 선택이지만 영원을 지배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전쟁은 38절 말씀처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책임이 따릅니다. 먼저 십자가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질 때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 나는지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39절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가장 어려운 말씀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얻은 생명을 소유한 사람을 뜻합니다. 살 동안 부모가 준 그 생명만을 얻어 사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서 이 땅에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라는 뜻은 예수를 믿고 영접할 때 십자가에서 나도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것은 실제 죽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죽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실제 죽은 것입니다.

 

2:20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주님이 주실 새 생명을 위해 내가 가진 목숨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나의 의지로, 믿음으로 죽인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이 믿음을 가집니다. “주님과 함께 나는 십자가에서 죽는다. 내가 죽을 때 나는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믿습니다.”  이 고백을 가진 분들은 주 안에서 거듭난 사람이 됩니다. 그들은 새 생명,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게 됩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부활의 영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만 말한 부분에서 빠진 목적어입니다. 그러므로 39절 하반절을 다시 보면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부활과 영생을 )얻으리라고 읽으시면 됩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이 죽음은 그저 생명이 다해 죽는 육신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서 못박히겠다는 의지적이고 주님이 죽는 십자가 곁에 서서 내가 함께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믿음으로 죽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영적 전쟁을 선포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검을 주십니다. 이 검은 사람을 죽이는 검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검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세상의 어느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 내가 죽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뜻 앞에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를 죽일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