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3): 정상에서 만납시다
왕상 19:1-18
세상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기를 좋아합니다. 명예와 부귀, 그리고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서는 정상의 모습은 세상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18장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고 최고의 명예를 누리며 정상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방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진리가 세상에서 이긴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 무너졌던 여호와의 제단은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에 다시 한번 여호와 신앙이 회복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9장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선 정상의 자리는 매우 위태롭고 불안해 보입니다. 그 이유가 1절에서 소개됩니다. 여호와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단 한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이라는 아합의 아내였습니다. 참 대단한 존재입니다. 시집 올 때부터 이세벨은 바알 제사장들을대동하고 왔습니다. 그들을 위해 사마리아에 신전을 만들어 줍니다(16:32).위세 당당한 이세벨은 갈멜산에서 바알 신의 패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나왔기 때문입니다(2절).
우리가 대항하는 세상은 항상 만만치 않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 물 귀신 작전을 사용합니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여 버리겠다고 더 세게 나옵니다. 보이지 않는 신들의 싸움에서는 졌지만, 보이는 세상에서는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결국 이세벨의 심중에는 신조차도 액세서리에 불과한 것임을 드러내 줍니다.
한편, 엘리야의 반응을 3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갈멜산의 대승리를 거둔 위대한 선지자는 겁에 질려 있습니다. 일국의 왕도 아닌 왕비에게 밀려 도망하려 합니다. 갈멘산의 승리는 무엇입니까? 현실로 돌아왔을 때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이세벨에게 쫓깁니다. 결국 패배자로 엘리야는 호렙산의 정상까지 도망쳐 내려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는 정상의 자리는 가장 먼저 모든 사람들을 다 이기고 승리한 자만이 우뚝 서는 자리가 아니라 세상에서 이기기 힘든 자와 싸워 패배한 자도 설 수 있는 위로의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참 감사하고 은혜가 넘치는 자리입니다.
세상은 실패하고 패배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내어주기를 허락하지 않는 곳이 정상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서 패배하여 만신창이가 된 사람에게도 그 자리를 내어 주십니다.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계십니다. 위로자 되시는 주님의 초청에 응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하나님이 내어 주는 위로의 자리는 그곳까지 가는 힘든 여정이 필요합니다. 어려운 과정이 있는 이유는 아직 하나님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 강한 세력의 우두머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싸우는 영적 세계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였지만 사탄은 아직 완전한 사망 속에 집어 넣은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 때까지 사탄의 권세는 여전히 발휘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며 겁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의 실제 모습을 이세벨이라는 여인을 통해 성경은 보여줍니다. 바알 제사장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홀로 살아 기세 당당한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사탄은 한번 입에 문 먹이를 쉽게 내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을 어렵게 보도록 유도합니다. 그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도록 만듭니다. 깊은 감정의 수렁으로 빠지게 만듭니다. 뒤에서 뭔가 달려드는 느낌이 들도록 몰아 붙입니다.
한 때 위대했던 엘리야도 이세벨의 추격을 피합니다. 그녀의 영역으로부터 즉각 벗어나고자 북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갑니다. 3절을 보면 국경을 넘은 엘리야는 계속 남하하여 브엘세바에 이릅니다. 브엘세바는남유다의 가장 남쪽 국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애굽에 도달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로 도망치고 그것도 불안해서 유다의 최 남단까지 도망쳐 왔던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사람들도 세상에서 만신창이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더 힘들게 할 때 주님이 허락하시는 위로의 자리에 더 가까워진다는 믿음으로 견디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은 상처로 인해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향을 보여줍니다. 그 아픔을 주께로 향하는 열정으로 전환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좌절을 느낄 때 교회로만 방향을 정하고 주님께로 도망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세상에 살았지만 다시 십자가를 향해 달려 오기만 하면 됩니다. 나의 피곤한 심신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엘리야는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방향을 돌려 광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성도님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힘들면 세상에서 힘을 다시 찾으려고 조용한 곳, 휴식을 제공해 주는 오락 장소, 스포츠, 정신 건강을 회복하는 심신 수련장 등을 찾습니다. 물론 찾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가는 마음 없이 그곳을 찾아가면 돌아서면 허무와 공허,두려움이 다시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힘들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담 되고 소망을 잃을 때 방향을 잘 잡으셔야 회복이 가능합니다. 오직 가야 할 방향은 광야 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구름과 불 기둥이 앞서 가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직접 이끄시는 보호의 장소입니다. 그러면 광야는 지금 이 시대에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속의 교회가 바로 광야입니다. 이상하게 들립니까? 아닙니다. 광야는 만나가 매일 해 뜨기 전에 쏟아지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매일 말씀이 선포됩니다. 매일 먹는 말씀은 정말 중요합니다. 광야에서 오늘 만나를 얻지 못하면 하루를 굶는 것입니다. 일주일을 얻지 못하면 거의 죽게 됩니다. 한 달은 거의 무덤에 들어가기 일보 직전의 시체와도 같은 상태입니다. 성도님들의 삶에 말씀인 만나가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정상의 자리는 둘째로, 세상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 오직 세상과 반대 방향인 광야로 달려 오는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말씀의 자리입니다.
이제 엘리야는 광야에서 하루 길을 더 들어 갑니다. 정상에 서기 전에 한 가지 더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엘리야는 마지막으로 타인이 주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싸우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외부의 위협 때문에 도망쳐 왔는데 이제는 자신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나는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인가? 이런 내가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는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목숨 만을 구하기 위해 도망만 치는 겁장이에 불과한가? 갈멜산의 승리가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정말 죽고 싶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 할까? ‘저 사람 그 정도의 사람이었어. 야 이제 보니 너무 실망스러워. 저 사람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사람이야.’”
뭐 이런 생각들이 엘리야의 내면을 마구 뒤집어 놓습니다. 위대한 선지자마저도 내면 속의 감정의 굴곡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기를 원합니다(4절 하). 그러나 엘리야가 지금 들어와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광야입니다(4절), 교회입니다. 주님 안 입니다. 이미 광야에 들어온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법에 의해 특별 관리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성도는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이 5절 이후부터 소개됩니다. 지쳐 죽기를 기다리는 엘리야를 위해 하나님은 천사를 보냅니다. 천사가 어루만지며 의식을 차리게 합니다. 그리고 떡과 물을 주어 힘을 내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도 너무 지친 엘리야를 일어나게 만들지 못하고 다시 눕게 만듭니다(6절). 그래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지며 음식을 먹입니다. 그리고 그가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이유가 7절에서 소개됩니다. 그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인 사명을 발견하는 장소 호렙산까지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좌절하여 심지어 죽기까지 빠져드는 감정의 굴곡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드는 환경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정상까지 가도록 저항할 수 없는 위로의 단비를 마구 부으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죄를 들추어 내며 우리를 죽이는데 까지 갑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없게 짓밟아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상처와 허물을 가진 자들이 주께로 나오기만 하면 주님의 보혈이 허물을 덮어주고 우리의 약함을 그분의 능력으로 채우셔서 다시 소생시키는 위로의 자리에 세우십니다. 우리를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설 수 있게 만드는 변화의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정상의 자리는 셋째, 하나님의 은혜와 무한하신 성령의 위로하심과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지친 자들을 회복시키며 주님의 전사로 무장시키는 장소입니다.
이제 최정상에선 엘리야의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호렙산의 정상에서 하나님은 직접 엘리야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사람의 감정을 들뜨게 만드는 소리나, 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밀한 음성으로 다가 오는 영적 체험인 것입니다. 아직도 교회에 다니며 한번도 체험이 없는 분은 반드시 주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체험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자복하십시오. 내 죄로 인해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절망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나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사망에서 나를 구원하실 분이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 시키는 대혁명입니다. 그리고 세밀한 음성으로 찾아 오십니다. “내가 너를 나의 자녀로 삼았다. 내 사랑하는 아들의 구속의 피로 너를 죄에서 해방시켰다”는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확신이 내게 밀려 오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들은 자는 살아납니다. 왜냐하면 사명이 비전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15-19절). 엘리야에게 당시 세계 질서를 바뀌게 될 아람의 새 왕을 세우는 비전이 제시됩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예후 왕조를 세우는 비전입니다.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엘리사에게 기름 붇는 비전입니다. 마지막은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이루어 나갈 칠천 명의 동역자를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비전은 세상에서 실망하는 자를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죽음을 앞 둔 사람에게는 부활을 믿는 믿음이 됩니다. 비전을 가진 성도는 죽지 않습니다. 비전을 품은 교회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비전 있는 민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망을 위해 세워진 것은 무너지지만 하나님의 뜻이 구체화 되어 보여진 비전은 우리를 통해 반드시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세우는 최정상은 비전을 제시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서게 하는 정상은 인간의 야망이 불타오르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으로 충만케 되는 자리입니다.
코넬한인교회가나누고 있는 비전들을 함께 공유하시고 이루어가는 일에 동참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