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18): 영적 승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마26: 36-46
예수님에 대한 시리즈를 마감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영적 승리를 위해 기도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삶에서 정말 고민되거나 슬픈 일이 내게 생길 때 기도하셔야
됩니다. 37절에 ‘고민하고 슬퍼하사’ 그리고 38절에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느니’ 라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주님의 최대 고민과 슬픔이 무엇이었는가를 26장은 전체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2절에의하면 며칠이 안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실망하고 좌절 되었겠습니까? 모든 소망에 부풀어 있던 제자들에게는 천청 벽력과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민거리였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태는
두 가지 이야기를 중간에 삽입하고 있습니다.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모의를 구체적으로 시작하는
모습이 3-5절에서 포착됩니다. 이어서 6-13절에서는 나병환자였던 베다니 시몬의 집에 있을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직접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주님의 죽음이 구체화 되어가는 모습을
14-16절은 보여줍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고 금전적인 대가를 받는 분주한 장면이 그려집니다. 죽음을 앞두고 주님의 주변에서 이런 긴박한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은17-30절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제외하고는 아무고 지금 무엇이
자신들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슬프지만 31절에 의하면 사랑하는 제자들이 다 오늘 밤 이후 주님을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민과 슬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은 기도하려 나아가십니다. 우리 같으면 잠이나 자고 말 것입니다. 어차피 이제 지상 사역이
다 마무리 될텐데 기도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자들과 이별식도 했고 식사로 배도 채운 상태입니다. 바로 다가올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기 위해 힘이나 보충하기 위해 푹 쉬어야 겠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십니다. 사실 마음이 매우 고민되고 죽을 것 같으면 혼자 기도하러 가시지 제자들은 왜 데리고
갈가요?(36절) 바로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힘들고 정말 어려운 일이 있을때는 포기하고 잠이나 자는 것이 아님을 몸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힘들어 죽을 것 같을 때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내 의지가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 할 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3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오해말 것은 주님이 아버지의 뜻을 몰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의 사건은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죽기위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말이 왜 나올까요? 정말 헷갈리게 만듭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겠다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사형수가 집행 날짜가 점점 가까워질 때 느끼는 그런 불안감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주님께도 전혀 없었다고는 저도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해둘 것은 그런 것으로 마음이 고민스럽고
죽게 된 지경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숨이 끊어지기까지 긴 십자가 형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한 성인 남자가 벌겨 벗겨지는 수치감 등으로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주님이 세 번이나 기도한 것이 십자가 형을 자신에게서 지나가기를 간구하셨다면 정말 문제입니다.
주님이 그런 분이라면 믿는 것 한번 제고해도 될 것 같습니다.
주님이 지실 십자가 사명 자체를 안하시겠다는 것을
간구했다면 어떻게 그런 분을 우리의 구원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사망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 모든 인류는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어떤 인간도 율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좌절감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인류의 비극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엄청난 사고를 막판에 치기위해 죽기 조금 전에
고민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것으로 고민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잔’ 이라는
의미는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런 문제 다 고민하셨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전히 고민을 갖고 오셔서 이 땅에서 살면서 십자가 질 것 확실히 결정한 후 하나님께
통보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39절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려는 순간 뭔가 원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생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혹시 아버지의 뜻을 거슬리지 않는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민하는 것은 바로 ‘때’입니다. 이번이 아닌
다른 유월절은 안 되나요? 그런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17장의
제자들을 위한 긴 기도가 바로 이것을 증명합니다. 아직 훈련되지 않는 제자들을 두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는 정말 고민거리임을 요16:1-7절에서 암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뭔가 다른 생각이 우리 속에 생길 때 성도는 기도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셋째, 내 생각이 하나님의 뜻을 가로 막으려 할 때는 기도의
동역자들을 깨워서 함께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제자들을 다 데리고 겟세마네에 오셨습니다(36절). 그런데 그 중에서 세 명을 따로 데리고(37절) 주님이 기도하는 곳에 더 가까이 데리고 가서 기도하십니다(38절).
세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간 것은 이번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 명을 변화산에도 따로 데리고 가서 놀라운 장면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는 곳에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이번에도 주님이 기도하러
따로 세 명을 데려가셨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이 홀로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엎드려 대고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고 있었습니다(40절). 이때 그들을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 말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은 기도할 동역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바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 속에서 원하는 바가 생길 때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바와
상충되는 것인가를 알기를 원할 때 기도의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이 때에는 혼자 나아가는 것보다
기도의 동역자들과 함께 나아가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참 놀라운 것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가장 힘들어 하는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대부부 이런 문제가 생기면 혼자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원리는 1, 2, 3 입니다. 가장 먼저
혼자 주님과 일대일로 대화를 시작하십시요. 그리고 그 기도가 간구로 바뀔 때에는 마 18: 19절 말씀처럼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묻든 기도라면 세 명의 기도 동력자와 함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최소한 나의 기도 제목을 나눌 세 명을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목원들이 가장 쉬울 것입니다. 그것이 힘드시면
목장지기 그리고 여러분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분에게 기도 제목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이런 좋은
기도 응답의 비결을 가르치는데 우리가 하지 않는다면 정말 말이 안 됩니다(예: 이번 우리 교회의 기도 응답의 간증자).
기도에 실패했던 세 명의 제자들은 나중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게 됩니다.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요3:6).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나중 기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야고보는 순교로 인해 그때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들이 변화되어 주의 사역을 이루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해 응답 받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육신이 연약하여 쓰러져 자고 싶고, 쉬고 싶을 때에도 내 마음이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힘들어도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영적으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승리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육신이 늘 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바로 육신에 젓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질 수밖에 없었을까요? 심각성을 정말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26장 전체에서 십자가 죽음을 지속적으로 말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2절에서 이틀이 지나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뭔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옥합을 깨드릴 때에도 ‘이 여인은 나의 장례를 위한 것이니라’고 12절에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분명한 암시들을 제자들에게 시속적으로 주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마친 제자들 모두에게도 ‘오늘 밤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다’(31절). 그리고 34절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까지도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이들을 데리고 기도하려 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해보면 이들의 영적 상태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내 삶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논문, 실험, 직장 문제, 자녀 문제, 미래의 불확실성, 결혼 문제 등등 매우 심각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일들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태평스럽기만 합니다. 이것은 강심장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포기하고 마음의 안락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거칠게 밀려오는 파도 속에서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죽을 것을 각오하고 하늘을 향해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은 오직 기도뿐입니다’를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정말 절박한 상황입니다.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네요. 그래서 지금은 포기했습니다.’
이런 말은 정말 진지하게 그 문제를 주님께 아뢴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절박함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붙드는 것이 절박함의 모습입니다. 사탄은 바로 그때 시험합니다. “해도 안 되는 것 더 기도한다고 될 것 같아. 그냥 몸이라도 쉬어.’ 라고 속삭입니다.
절실하고 절박한 나의 문제를 두고 기도를 멈추어 버린 것은 시험에 이미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이 바로 쉬기를 원할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멈출 때 우리는 이미 사탄에게 진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이 늦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휴식이 있는 노동이 아닙니다. 쉬지 않고 하는 영적 노동임을
믿고 기도하는 복된 성도님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