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4)-성경이 말하는 세상
왕상 1:1-14
성경적 세계관으로 주제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시리즈를 통해 세상에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이유를 발견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처세술을 가르칩니다. 그러나성경은 진리를 선포합니다. 진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모든 것을 말합니다. 시대가 흘러도 불변하는 진리가 담긴 성경은 세상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 속에서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매일 만나는 세상은 나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진 경쟁 상대가 이미 너무 많이 앞서 포진해 있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다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왠지 살짝 겁이 납니다. 오늘 본문 속의 솔로몬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을 이어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할 때 그에게 가장 힘든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5절에서 그는 바로 형 아도니아였습니다. 그는 암논, 길르압, 압살롬에이어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습니다(삼하 3:4).
첫 아들 암논은 다말 사건 후 이미 죽었습니다(삼하 13:29-33). 역상 3:1절에 의하면 둘째 아들 다니엘(길르압)에 대해 별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어떤 사유로 죽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셋째 아들인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하다 군대장관 요압에게 이미 죽임을 당했습니다(삼하 18:14). 그러므로 아도니야는 당시 왕위 계승 서열 1위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역상 3:3절에 의하면 스바댜와 이드르암이라는 형이 두 명 더 솔로몬 위에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솔로몬이 왕이 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불리한 입장입니다. 경쟁이 안 되는 구도입니다.
성도님들도 무한경쟁이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 이와 비슷한 환경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불리한 환경을 불평 없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태도가 당사자인 솔로몬으로 하여금 침묵하고 있는 모습으로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환경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남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7절에, 아도니아가 왕이 될 것을 모의합니다. 서열 1위의 아도니아의 행동에 대해 누구도 제동을 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종교 지도자 아비아달 제사장과 당대 최대의 군사적 힘을 가진 군대장관 요압이 후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찬성하지만 하나님만 그의 행동에 대해 5절에서 ‘스스로 높이는자’라고 평가를 내립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불리한 환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환경을 주신분께 감사하고 기다릴 때 하나님은 나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인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심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옴을 믿기 바랍니다.
둘째, 나에게 유리한 시간과 상황이 일단 주어지면 그때 중요한 믿음의 선택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아도니야는 먼저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을 살핍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환경인 늙은 다윗과(1:1) 그의 무기력(1:2)을 보면서 왕권도전을 합니다.
6절에 보면, 그는 특별히 남들이 갖지 못한 뛰어난 용모를 갖추고 있어 대단한 인기를 사람들로부터 누렸습니다. 게다가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섭섭한 말을 듣지 않은것으로 보아 도덕적 결함도 그다지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인듯합니다. 도덕적, 윤리적, 세상적 가치관으로 보면 참 만족할 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주위 인물들을 포섭할 수 있는 정치력을 겸비한 사람으로까지 보여집니다(7, 9절).
한 가지그에게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이 선택한 영(Zero) 순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인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 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라는 하나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신 17:14-15절은 이스라엘 왕의 선출에 대한 명령이고 왕이 지켜야 할 일을 명령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왕이 될 사람이라면 이 말씀은 분명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아도니야에 대하여 ‘스스로 높여서’ 그리고 ‘내가 왕이 되리라’는 자신의 의지와 자신감을 더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해 버리는 선택이 가져다 준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를 교만한 자로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이런 교만을 부추긴 것은 주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에서 주의하기 바랍니다. 그들은 아도니아를 ‘따르고 도왔으나’ 결국 7절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의’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묻는 겸손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자는 어떤 줄에 설 것인가? 어떤 사람이 나의 출세에 더 유리한가? 누구를 지지해야 나에게 앞으로 이익이 될까? 이런 것에 온통 신경을 쏟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환경을 바라보며 이익만을 따지는 그런 사람들과 반드시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과 구별되게 믿음의 선택을 하게 불렀던 것입니다.
셋째, 좋은 선택이 가능한 것은 여러분 주위에 믿음의 사람들이 함께 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은 여러분 주위에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포진시켜 둡니다. 이 모임을 ‘교회’라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나누는 아름다운 나눔을 ‘친교’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의’가 아닌 비전을 세워 나가는 사람들임을 8절은 알려줍니다. 또한 9절은 서로 학연, 인연, 지연으로 뭉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역하는 자들이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아도니야 편에 선 사람들이 소개됩니다. 먼저 아비아달 제사장은 이미 사무엘 시절에 엘리 제사장 계열에 대한 파면이 예언된 후손이었습니다(삼상 2:31-33). 실로에 있는회막에서 하나님께 불충하는 아들들에 대해 둔감했던 엘리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역량을 정치적 현실과 타협하여 이어가려고 결국 아도니야의 모반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아비아달 제사장의 역모는 당시 함께 제사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사독 제사장에(삼하2:35)) 대한 시기도 한 몫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늘 두 사람 중 사독의 이름이 주도적으로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삼하 8:17; 15:29, 35). 세상에서 자신의 힘이 잘 발휘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힘과 권력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리고 억지로 자신을 스스로 부상시키려는 욕심에 눈이 멀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 영역에서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은 충실한 다윗의 오른팔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점점 권력이 주어질 때 다윗의 명령보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유리하게 행동합니다. 다윗의 반대편에 선 장수들을 받아들여 신하로 삼으려는 다윗에게 불만을 품고 그들을 다윗 몰래 죽여 버립니다(삼하2:5,3:27; 20:10).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보아 그는 다윗이 쇠약해 질 때 자신이 세운 왕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계속적인 권력을 유지하려는실리적인 판단을 가진 자로 평가 될 수 있습니다.
한편, 솔로몬을 돕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알게 합니다. 11절에 나단 선지자는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머니 밧세바에게 알려줍니다. 지금의 상황을 반전 시키려는하나님의 움직임이 실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12절). 답이 늦어진다고 스스로 혼자 결정하고 행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 사람들을 예비하시고 계십니다. 그들은 절망 가운데 있는 여러분에게 바른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여 나를 일으켜 세우게 도와줍니다.
돕는 자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충성스럽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8절에서 언급되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다윗의 용사들입니다. 브냐야는 외국인으로 구성된 용병 부대를 리더하는 장수였습니다(대상23:23). 누구보다도 다윗을 사랑했고, 측근에서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는 시위대장의 역할을 했습니다(삼하 23:20-23).
다윗이 가장 힘들어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나가는 현장을 함께한 동지들이었습니다(삼하 23장). 다윗의 용사들과 브나야는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자신들을 인정해주고 거두어 주고, 품어 주었던 다윗을 잊지 못하고 늙어 기력이 쇠한 다윗을 위해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충성을 그의 아들에게까지 이어갔던 것입니다. 의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믿음 때문에 함께하는 분들이 여러분 주위에 늘 있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경쟁자들은 대단히 빠르게 움직일 때 주님은 세우신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마지막까지 기다리게 하십니다. 인내는 어떤 계략이 세상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만이 승리한다는 확신을 주는 성도의 무기입니다.
아도니아를 돕는 자들의 주도 면밀한 움직임을 9절에서 보기 바랍니다. 잔치를 위해 소와 양과 송아지를 잡는 위장을 합니다. 그러나 그 잔치 모임은 스스로 왕이 됨을 선포하고 백성들로부터 인정 받기 위한 제사 자리였습니다. 압살롬 때에도 제사를 가장하여 반역을 도모했던 적이 있었습니다(삼하 15:7,12). 잔치를 가장하고 종교 지도자를 초대하여 자신들의 행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거짓으로 백성들에게 알리려 했던 것입니다.
한편, 한 가지 정말 안타까운 것은 왜 다윗은 늙어 이불을 덮어도 추위를 느끼는 그때까지 왕위를 발표하지 않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은 산전수전 다 겪은 배터랑입니다. 그런 그의 태도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행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려는 신실함을 30절에서 보여줍니다.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반드시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왕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 그대로 행하리라.”
비록 그가 나이가 들어 이불을 덮어도 추위를 느끼기는 노인에 불과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생애에서 몇 번의 반역을 경험한 다윗은 야심에 찬 아들들을 기다리게 함으로 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이며 충성스러운 사람인가를 확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리고 유약한 솔로몬을 위해 그들을 제거하고 평화롭고 안정된 나라를 넘겨 주려는 그의 마지막 노력이었습니다(1:12, 21).
하나님이 결정한 솔로몬의 왕위 계승을 형인 아도니아도 인정하는 모습을 다윗은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도니아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아비를 거역하는 불충을 먼저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아닌 때에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모두가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논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실패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의 시간을 먼저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순종입니다. 목숨이 얼마나 남지 않음에도 불구하고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분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코넬한인교회 성도님들! 인내는 알곡을 가려냅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나타내 줍니다. 인내의 시험에 합격하시기 바랍니다. 답이 안 풀리고 힘들 때에도 끝까지 인내하셔서 진리가 승리하는 삶을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