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 신비한 일에 관여하십니다 

1:18-20


 

마태복음에서 나타나는 성령에 대해 새로운 시리즈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주님의 성육신 사건에 개입하는 성령을 바라보면서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은 인간 역사에서 한 번도 없었던 신비한 일의 주인공으로 역할 하십니다. 이 천년 전 유대 땅 한 처녀에게 일어난 사건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적령기가 되어 한 남자와 결혼을 약속합니다. 이들은 아직 부부로서 살기 전이라서 임신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다른 남자를 만났다거나 아니면 두 사람이 합의하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는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두 당사자들은 이런 일에 무관함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혼자인 요셉은 남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조용히 파혼까지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19).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중매로 이 두 사람이 결혼하기로 가족들끼리 약속을 했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 사랑하고 부모들의 허락을 받았다면 이 사건은 당사자들에게는 엄청난 비극인 것입니다. 마리아로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너무 난감합니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로도 요셉을 설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요셉의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만나는 동안 특별한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요셉으로서는 정말 혼란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20절에 의하면 천사가 꿈에 나타나 요셉에게 성령으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천사도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말하는 성령은 더 신비합니다. 자신의 약혼녀를 임신시킨 주체가 사람이 아닌 성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 경험상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성령이 인간에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앞으로 알아가야 할 성령님의 첫 모습입니다.

 

처녀가 결혼도 하긴 전에 임신하는 놀라운 그 일을 성령이 이루었다라고 18절에서 선포합니다. 마태는 인간 역사에서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신비에 가까운 일의 주인공으로 성령을 소개합니다. 성령님은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이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 내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 마리아에게만 아니라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오셔서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이적과 기사에 지금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은 어떤 사람일지라도 그들에게 다가가실 때 매우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임신에 관여하는 성령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마태는 마리아의 임신 사실보다는 오히려 더 요셉에게 초점을 더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들을 더 관심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26절을 보면 마태복음에서의 요셉처럼 꿈으로 마리아에게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 가브리엘 천사가 갈리리 한 동네에 사는 마리아에게 갑니다(27). 28절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말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직접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위한 배려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놀라운 일이 앞으로 마리아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냥 꿈에서 말만 했다면 마리아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꿈이기 때문에 시집을 앞둔 처녀의 긴장상태에서 일어난 현상으로 취급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꿈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일방적으로만 전달되면 사실상 마리아의 동의도 없이 이루어진 임신이라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천사는 직접 마리아를 방문합니다. 말씀을 다 들은 후 마리아는 눅1:38에서 저는 주님의 여종이오니 당신의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질 것을 믿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의지를 갖고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마리아 자신에게 일어날 것들을 미래의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분명 그녀의 허락이 있고 임신이 나중 일어난 것임을 증명합니다. 후에 잉태된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아는 친척인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1:39-45).

 

이 모든 설명은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성령이 하찮은 한 인간을 매우 인격적으로 대하는 모습입니다. 일방적인 통보가 아닙니다. 복종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한 시골 마을의 처녀에게 하나님은 계획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서 수 많은 거부를 여인들로부터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성령의 인격적인 모습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거듭남의 역사에서도 보여집니다. 복음을 듣고 자신이 정말 죽을 죄인이라는 지적인 동의가 일어납니다. 감정의 반응이 후회와 회개의 눈물이 동반되어 쏟아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나의 구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겠다는 마지막 의지의 결단이 믿음으로 입술로 고백됩니다.

 

이 모든 과정속에 성령은 강압적으로 인간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믿음의 고백은 성령이 한 인간을 거듭나게 역사하도록 허락하는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무한한 힘을 가진 성령이 인간을 대하는 하나의 신비입니다.

 

셋째, 성령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하게 함으로서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죄 없는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하는 신비한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인간 구원의 역사는 예수로 인해 새로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주님이 오기 전까지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그 법들을 다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키지 못한 그 부분을 용서 받기 위해서는 동물의 피로 대신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율법준수와 동물제사는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의 제사가 시간이 갈수록 너무 형식화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제사는 드려졌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베풀어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과 구원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준수와 동물제사라는 구원의 방법이 소개되었다 할지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그들 역시 율법을 다 지켜야 하고 동물제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범하는 죄를 어떻게 제한된 동물들로 충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형식화 되어갈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따지고 하나님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일이 반복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동물제사가 사라져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죄에 대한 완전한 심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죽음으로 심판 받는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이 대신 죽는다는 것은 뭔가 부족한 면이 보여집니다. 사람의 죄는 사람이 죽어야 완전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죄 짓는 인간을 모두 심판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지구상에 남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구원을 계획해 두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십자가에 달릴 희생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제물이 모두 흠이 있다는 것입니다. 흠 없는 제물이 희생물로 드려져야 하는데 인간은 한 사람도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으로 오신 이유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실 때 성령으로 잉태하심으로 죄 없는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릴 유일하신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 구속을 위해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는 신비한 사건에 성령이 관여했던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항상 찬양과 기쁨으로 채워지는 신비한 일에 관여하십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살던 시대는  모두가 율법을 따르던 시대입니다. 처녀가 임신하면 율법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마리아로서는 너무나 억울하게 죽어야 할 것입니다. 가족의 수치이며 가문의 불명예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임신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1:38, 46).

 

그리고는 다른 이유도 없이 마리아는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갔다고 39절에서 누가는 기록합니다. 그녀가 산지에 살았기에 사람들의 눈을 어느 정도 피하고 여러 소문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엘리사벳 역시 늙은 몸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방문으로 아이를 가졌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가장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찾았던 것 같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볼 때 성령 충만함을 받아( 1:41) “당신은 내 주님의 어머니라고(1:43) 축복하고, ‘당신은 복된 여인이다라고( 1:45) 위로합니다.

 

이때 마리아 역시 아이가 뱃속에서 뛰놀기 시작하면서 찬양으로 화답합니다(1:46). 1:46-47절을 보면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나의 구주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법에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뛰어넘어 찬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상황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까? 비록 천사에게 승낙은 했지만 정말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아직 남편의 집에서 살지도 않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몸은 불러오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눈길을 피하기가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죽을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죽어야 될 사람이 죽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사용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수치와 죽음까지도 예상될지라도 살리는 역사를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신비롭게 역사하는 모습입니다.

 

전혀 상황이 찬양하고 기뻐할 처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은 내 영혼이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삼서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이 잘 되면 모든 것이 주의 뜻을 이루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리아로 하여금 그녀의 영혼이 찬양과 기쁨으로 채워지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 놀라운 성령의 신비한 사역을 믿음 생활 가운데서 맛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