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2): 주님의 세례에 임하셨습니다
마3: 16
성령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세례장면에서 나타나는 성령님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는 특별한
역할을 감당하시는 분이십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주님 위에 임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태는 답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 1:31절을 보면 세례 요한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주는 이유는 ‘주님을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세상에 알려야 할 그 사람이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했습니다. 요1:33절에 의하면 그분이 누구인가를
아는 방법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어떤 한 사람에게 성령이 내려서 머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실제로
어느 날 세례 세례요한이 요단에서 어떤 한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을 때 성령이 그에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요 1:34상). 만약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지 않았다면 요한은 주님을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요1:34하)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에서 보여지는 성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세상에 선포하는 역할을 하시고 돕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를 믿게 될 때 그분이 우리에게 임재하십니다. 우리 속에 임재하는 성령님은 나에게서 주님을 나타내도록 하십니다. 나에게서
주님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예는 예수 믿고 난 뒤 옛날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먼저 감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사를 모르던 사람이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입술에 찬양이 흘러 나옵니다. 말씀을
손에 들고 묵상하는 습관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날마다 내 속에 죄가 꿈틀거릴 때 몸부림치며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자백하며 눈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 되었습니다.
자존심으로만 살아왔지만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이제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무너져 가는 나를 바라보며 내 힘이 아닌 주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입술에서 아멘과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쑥스럽던 소리가
이제는 자연스러워집니다. 부드러워진 마음이 나를 이제는 몸을 굽혀 섬기는 자리에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드림이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내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는 희생의 사람이 되어 주를 섬기는 모습이 내게 있습니다. 내 속에 계신 성령이 나를
변화시켜 주님이 드러나게 하고 주님이 그리스도임을 나타나게 하는 일을 위해 역사하도록 만드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은 비록 영으로 존재하지만 육신을 가진 인간의 눈에도
그분의 사역활동을 이해하도록 가시화 되어 나타납니다. 바로 그 모습이16절에서 주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사람 눈에 보이게 하는 이유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존재하기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령의 능력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병
고침이나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가는 모습 등에서 보이지 않는 성령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행 2:3은 불로, 요 3:8절은
바람으로, 요7:38-39은 생수의 강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 생수가 흘러 넘치는 것 같은 기쁨이 충만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과 같은 심판의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 속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는 신비로움을 설명하기 위해 바람으로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장면에서 성령은
비둘기 같이 실제 사람의 눈에 보이게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가시화되어 실제로 보였다는
것이 앞에서와는 다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불의 혀
같은 것’으로 그리고 ‘바람소리’로 눈에 보여지고 귀에 들려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인간에게 보여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 역시 성령의 사역을 설명해 주기 위함입니다.
구약을 보면 특별한 사람들을 사사로 세울 때나 왕들로 임명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으로 인해 삼손의 경우 놀라운 힘을 소유하는 등 특별한 능력을 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세례장면 이후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모습은 육신으로 오신 주님이 이 땅에서 메시야로 직분을 임명 받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구원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는 것을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과 그 의미를 사도행전 10:38절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라고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비둘기는 노아 홍수 사건에서 까마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새들을 날려 보냈지만 오직 다시 날아온 것은 비둘기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에 감람나무 잎을 물고 와서 심판과 죽음의 홍수가 끝이 남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많은 새들이 상징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비둘기는 무엇보다도 복음의 메신저와 사람과 함께 하는 모습이 나타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우리들에게 성령은 우리 속에 영원히 내재하시며 떠나지 않습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비둘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한 것은 성령 그분 자체는 어떤 분인가 하는 궁금점이 생깁니다.
셋째, 성령은 하늘로부터 온 거룩한 하나님의 영입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하늘이 열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수님 위에 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며 하나님의 영이라는 사실이
그분 존재에 대한 설명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것은 성령이 행하는 역사가 무엇이며
그 역사를 잘 설명해 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들을 가지고 성령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성령 그분 자체에 대해 알아볼 시간입니다.
‘하늘이 열리고’라는
표현은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는 모습입니다. 성령이 피조물의 세계에 들어오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NIV) 모두 ‘하늘’로 단수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KJV, NASV 영어 성경은 “the heavens were opened” 로
복수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아는 하늘과 다른 하늘도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 ‘하늘’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실제 원어에는 ‘하늘들’ (οὐρανός 우라노스) 복수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창세기 1:1절에도
‘하늘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인간의 사고 속에서 생겨난 개념적
사유물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부터 오신 인격체입니다.
주님에게 임한 성령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성령님 역시 그분도 거룩한 영이라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속에 성령이 거하게 됩니다(고전 3:16). 우리 속에 거하는 성령은 원래 하나님이 거하는 같은
장소에서 오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분에게 속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보내신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같다라는
의미 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또한 성령은 ‘거룩하게
하는 영’입니다(성령이 거룩하게 하심: 살후 2:13, 벧전 1:2).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인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 역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전 6: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요일 1:9절은
거룩하게 된 우리가 매일 그 거룩을 유지하는 법을 ‘우리가 날마다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미쁘시고(성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이 성도를 매일 매일 거룩한
삶으로 살아가도록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땅의 인간과 하늘의 하나님을 연합시키는 분이
되십니다. 16절을 보면 ‘하늘이 열리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동태로서 인간이 하늘을 연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존재에 의해 열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늘이 열린다’라고 표현했지만 동일사건을 다루는 막 1:10절에서 ‘하늘이 갈라짐’으로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짐’과(막15:38) 같은
단어입니다.
성소의 휘장을 사람이 찢을 경우
아래에서 위로 찢어졌겠지만 휘장은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휘장이 짖어지는 사건도 하늘이
열리는 사건도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여는 주체의 뜻이 있지 않고서는 절대
열려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열린다’는 지금까지 막혀 있던 것이 열려 서로 간의 소통이 이루어
진다는 뜻도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을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인간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막혀 있던 것을 열고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기 위한 준비로 보여집니다.
실제로 주님의 세례 시에 있었던
성령 임재 이후 믿는 각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모습을 사도행전 2:1-3은 기록합니다. 이때에는 하늘이 열렸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열린 하늘에서 약속된 성령이 임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단지 특정인에게 한시적으로만 임하였던 성령이 이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굉장한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는 모든 사람 가운데 거하는 성령은 우리를 돕는 자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로 8:26-28절을 보면 성령은 믿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세 가지로 돕습니다.
가장 먼저, 무엇을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지 못할 때에도 성도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연결해 주셔서 모든 것이 선을 이루도록 협력해 나가십니다.
우리가 지치고 힘들고 병들 때 주께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 낙심되어 무너질 때 주님을 찾지 못합니다. 기도의 문이
닫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의 문과 입술이 닫혀 있을 때에도 성령은 쉬지 않고 기도하십니다. 한편, 우리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지 못해 기도 응답이
늦어질 때 성령은 이때에도 우리를 위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대신 간구하여 주셔서 응답이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허락해 주시는 이 엄청난
복을 저와 여러분이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