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5): 너무 수와 양에 민감하지 마세요
왕상 20:1-13
성도가 세상과 어떻게 다르게 살아야 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주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금의 시리아로 알려진 아람이라는 나라와 북이스라엘과의 전쟁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모습’을 나누어 볼까 합니다.
첫째, 세상은 상대를 단지 눌려 놓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고 숨통을 조여 결국 죽이는데 까지 가는 최종목적을 설정해 두고 전쟁에 임하게 됩니다.‘상대가 죽어야 산다’는 생각이 세상의 지배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절을 보면 아람의 이스라엘 죽이기 작전이 준비되고 있습니다. ‘전쟁’은 적으로 간주된 상대를 물리적인 피해를 가해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생존 전략입니다. 아람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위해 무려 32명의 왕들로 구성된 연합군을 구성합니다. 동맹을 형성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질 때 북이스라엘은 10지파라는 수적 우세를 확보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성을 건축하여 방비를 하게 됩니다. 또한 아합 왕은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 시돈과 결혼 동맹을 맺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남유다에 시집 보내 남유다로부터 군사적 후방지원 대책을 마련해 놓습니다(왕하 8:18). 그래서 아람도 함부로 이스라엘을 대하지 못하고 더 많은 군대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아람은 많은 군대를 확보함과 동시에 이기기 위한 다양한 전술을 미리 철저히 준비합니다. 가장 먼저, 성 안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자극하여 성질 급하게 성 밖으로 달려 나오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수적 우세로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탄의 속삭임에 당장 대응하면 안됩니다. 한방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성급한 대응을 자제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성도의 무릎입니다. 사탄으로 하여금 다음 수를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람은 첫 번 전술이 먹히지 않자, 다음으로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성을 철저히 봉쇄합니다. 장기전으로 돌입하여 모든 성 안 사람들을 말려 죽이는 작전을 실시하게 됩니다.이것이 아람의 전형적 전쟁 방식입니다(왕하 6:24-25,28). 결국은 살려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게 완전히 죽이는 것이 사탄의 최종 목적임을 아람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둘째, 전쟁에 임하는 상대의 마음 상태를 초반에 제압하기 위해 심리적 전술로서 세상은 항상 수적 우위를 확보해 둡니다. 수적 우위는 상대를 놀라게 하는데 가장 효과적입니다. 수에 놀란 적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으로 나아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남쪽의 애굽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아람으로서는 가장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는 전술입니다.많은 수의 군사는 비용이 들긴 하지만 전투로 인해 발생하는 인명피해와 장기 전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가 많은 것이 항상 이긴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의 승리는 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와 양에 성도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12, 16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람 군대의 강점은 군인의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그들의 약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수가 철저한 준비를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32개의 연합군의 수적 우세는 단합이라는 면에서 매우 약한 면이 있었습니다. 각 나라의 장수들의 생각과 전술들이 다르고 충성심에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아람은 종주국으로 전쟁에 많은 나라들을 참가 시키기는 했지만 전쟁터에서는 마음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람은 각 나라 장수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술을 대접하고 승리의 기세를 유지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탈자자가 생기기 않도록 세상적인 방법으로 단합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최대 약점이 노출됩니다. 성을 걸어 잠그고 있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치러 나온 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4절에서 본 것처럼 겁에 질려 한마디도 저항하지 못하는 아합 왕의 무력한 모습에 너무나 방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에 능한 아람 역시 나름대로 기습 공격을 대비해 두고 있는 모습입니다. 17절에 보시면 공격할 것을 대비해 최소한의 정찰에만 신경을 쏟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더 화근이 됩니다. 철저함이 아닌 간단한 대비책을 마련한 그들은 심지어 이스라엘의 공격이 시작될 때에도 장막에서 지휘부들이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16절에서 보입니다. 그것도 대낮부터 취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자신들에게는 군사적 수가 많기에 방심한 것입니다.
지휘부가 술에 취해 있다면 밑에 군사들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군인들 역시 수적으로 절대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과 지휘부가 보여주는 태평스런 모습이 더욱 그들을 안심하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크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람 병사 거의 전부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에 빠른 대응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죽고 도망가는 모습이 이것을 증명해 줍니다(20절). 그러므로 수적으로 우세한 것이 전적으로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셋째, 수적 우세를 확보한 세상이 취하는 다음 태도는 계속 상대의 약점을 붙잡고 위협의 강도를 높이며 협박한다는 사실입니다. 위협은 상대를 위축시키기 위한 전술입니다. 2-3절은 그들이 위협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소개됩니다. 먼저 일차 위협은 아합 왕의 재물과 소유, 그리고 아내와 자식을 아람 왕 자신의 소유물로 삼겠다고 협박합니다. 이 협박은 사마리아 성을 닫고 있는 이스라엘을 매우 자극시켜 전쟁에 응하게 하기 위한 전술 중의 하나입니다.
상대를 흥분시켜 문을 열고 무조건 한 판 붙게 만드는 전술입니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해도 성 문을 잠그고 버티는 적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아람 군대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 21절에서 소개되지만 아람 군대는 보병이 아닌 전차부대를 동원하여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23절에서 보여주듯 산지로 둘러싸인 사마리아의 성에서는 이길 수 없기에 그들에게 유리한 평지로 무조건 이스라엘 군사들을 끄집어 내야만 했던 것입니다. 사탄은 성도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무조건 떠나도록 만드는 것과 동일합니다.
5절에서는 다시 한번 더 이스라엘을 위협해 옵니다. 협박의 강도가 더 커집니다. 이제는 왕의 소유와 아내들뿐 아니라 신하들의 것도 모두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6절). 아합 왕은 두 번다 거절하지 못합니다. 4절에서 아람 왕을 지칭하는 용어가 “내주 왕이여” 라는 극 존칭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요청에 응하겠다는 응답을 합니다. 물론 시간을 벌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합 왕은 지체하게 됩니다. 그래서 5절에서 다시 사자들이 온 것입니다.
두 번째 위협에 아합은 조금 달리 반응합니다. 이번에는 장로들과 백성들을 모아 의견을 수렴합니다. 그리고 사신들에게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세심하게 보아야 할 것은 9절입니다. 여전히 아합 왕은 굴복적인 자세로 아람과의 정치적인 타협을 신중히 고려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상대의 대답은 어떨까요? 만약 우리가 사탄에게 나아가 ‘사탄아 지금 내 형편이 안 좋으니 나중에 해, 나 좀 봐 줘’ 뭐 그렇게 한들 사탄이 봐 주던가요? 아닙니다. 10절에 보면 벤하닷은 아합 왕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계획이 죽이기 위해 전쟁을 하러 온 것이고,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성도에 대한 불변의 태도입니다. 전쟁을 하면 다 가져갈 수 있는데 왜 협상을 해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이 불리한 입장도 아니고 상대의 약점 마저 쥐고 있어 모든 면에서 유리한데왜 이스라엘의 제안을 받아 들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고 성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겠다는 더 강한 위협으로 이스라엘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버립니다.결국 자신들의 숨겨둔 발톱을 드러냅니다. 적은 항상 적입니다. 영적 전쟁에서도 우리의 적은 동지가 한 순간도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지옥 불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의 적인 사탄의 위협에 타협으로 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사탄의 제안에도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은 항상 우리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유리한 위치가 확보 되면 최종적으로 마지막 공격 대형을 이루고 죽을 줄 모르고 불 나방처럼 덤빕니다(12절). 세상의 어리석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장기나 바둑에서 고수가 가지고 있는 ‘숨은 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다 말씀 드리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기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21절). 성도의 배짱은 우리 뒤에 하나님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의 패배인 마지막 심판과 사망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성도를 향한 주님의 손길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수와 양에서 열세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승리를 차지 합니다. 전쟁은 인간의 수적 우세로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사람들이 때로는 우리들을 수적 우세로 몰아붙일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그때 당당히 서서 대면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수가 작고 양이 적어도 세상과 한번 부딪혀 볼만하다는 믿음을 키우는 것입니다. 항상 인간의 논리인 수와 양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 보다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진 많은 수와 양은 하나님 앞에서는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수와 양을 가진 오만한 강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약자가 될 때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적다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많다고 밀릴 필요 없습니다. 진리는 항상 승리합니다. 주님만 붙잡고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싸우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