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3): 성령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마 12:22-32
주님의 지상 사역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을
때 성령은 주님의 사역에 함께 동역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사람들은 주님을 통해 나타나는 성령을
거역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첫째, 지금도 성령을 통해 병 고침과 귀신들이 쫓겨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분명 성령을 모독하는 태도이며
성령을 거역하는 말이 됩니다. 주님의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 한 사람이 소개됩니다. 그는 귀신 들리고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주님은 고쳐 주십니다(22절). 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다 놀라며 ‘혹시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가 아닐까?’ 라고
말합니다(23절).
매우 당연한 반응입니다. 이런 기적을 행하실 분은 오직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뿐임을 유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적 같은 주님의 치유 장면을 보고 바로 ‘주님이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이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놀랐다’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무리들과는 전혀 다른 말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 나옵니다.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 내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주님의
치유를 보면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님에게서 성령을 퉁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권능마저도 철저히 부인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성령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주님을 통해 나타났다’고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파하는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최소한 주님이 하나님의 권능을 가진 분임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증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사탄의 힘을 빌어 그 일을 한다고 말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은 인정하는 것을 자신들은 완강히 부인하려고
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마12:14절에 보면 주님을 죽이려는
의도까지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태도와 성령을 거역하는 말이 무엇인지
구별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몸인 교회에서 나타나는 십자가 구원의 능력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권능 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와 입술의 말들이 가장 우선으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주님을 모르기에 성령을 거역하고
모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우리는 진지하게 다가가서 정말로 결정적인 구원의 순간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귀에 복음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술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주로 시인하는 믿음의 고백이 흘러나오도록 우리는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투자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이런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성령을 거역한다, 죄 사함 받지
못한다. 구원이 없다’고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이
있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게으른 우리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어쩌면 성령의 역사를 더
부인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뒤 부분을
보면 ‘모이지’가 아니고 ‘모으지’ 아니하는 자라는 말에 더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듯 성도들과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교육, 전도와 선교, 구제와 봉사, 그리고 친교를 통해 주님이 함께하는 사역에 동참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사람들을 모으는 일에 성령의 사역이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복음 전하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성도가 새 학기에는 될 줄 믿습니다.
둘째, 믿는다고 하지만 성령을 모르고 하나님의 영이 아닌 악한
영을 더 의지하는 삶 역시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기에 성령의 역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분명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지 못하였기에 성령의 역사를 보면서도 마음으로 인정하고 입술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통해 역사한 것이 귀신들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임을 비유로 25-29절에서 가르칩니다. 나라와
집이 스스로 자기들끼리 싸우고 분쟁하면 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묶고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로 귀신은 같은 귀신들을 쫓아내지 않습니다. 약한 귀신을 복종시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안에 군대 귀신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눅 8:30).
믿는 성도가 감사할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영도 성령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소유하면 어떤 영도 침범할 수 없기에 예수 믿는 사람에게 귀신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혼이 문제입니다. 귀신이
우리의 영을 침범할 수 없기에 혼의 세계를 사탄이 힘들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믿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일어나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탄이 직접 우리의 영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으로
짜증나고 피곤하고 지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결국 영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것은 귀신을 쫓아내어 고쳐지는 문제가 아니라 혼을 강건하게 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나 도를 닦는 분들도 혼(생각)을 다룰 수 있기에 영적 치유가 아닌 정신적인 치유가 세상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내 믿음은 변하지 않기에 다른 종교나 수련 단체에 가서 영성 수련을 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그 이유는 혼을 맑게 하기 위해 우리의 영을 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영이 문제가 생기면 혼이 힘들어 하는 스트레스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43-4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합체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영이 혼을, 혼이 육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힘들어지면 혼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몸과 혼이 영을 지배할 수는 없기에 그것이 나의 영적 문제는 안 됩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귀신이 들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영은
혼과 몸과 연결되어 있기에 내 영의 세계에 누가 들어와 있느냐에 따라 내 혼과 몸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사탄의
영은 빼앗고 죽이고 도적질하기 위한 것입니다(요10:10). 그러므로
이것이 인간의 혼에게 영향을 주면 자연스럽게 영혼의 질서가 깨지고 내 육체가 파괴되는 곳을 향해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정신적으로 힘들면(혼)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점을 치고
오락에 빠지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선택해서 내 육체가
죽어가는 나쁜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만약 성도에게 이런 삶의 방식들이 있다면 내 영을 지배하는 성령에게
의지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를 영접하지 않겠다는 입술의 최종적인 말’로
나타납니다. 32절을 보면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함을 받으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부터 분명해야 합니다. 32절을 좀 더
자세히 보면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기록합니다. 먼저 이 세상에서 사함을 얻지 못해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죄 사함 받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제 32절을
다시 보면 ‘말로 예수를 거역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데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더 복잡한 문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알고 있는데 예수를 거역해도 죄 용서함 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확실히 해야 할 것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이 말의 의미는 죄 사함 받고 구원에 이르는 문제에서 예수님보다 성령의 역할이 크고 작다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구원의 전 과정에서 더 근원적인 시발점이 성령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과정에 개입하는 성령의 역할을 보아야
합니다. 로10:10절을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나의 죄를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음을)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예수가 구주이며 주인임을)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고전 12:3에 의하면 ‘누구든지
성령이 없으면 예수를 주라(입으로) 시인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성령이 처음부터 보이지 않게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난 뒤 예수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입술의 말은 성령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결국 용서 받지 못할 죄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바로 구원 못 받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거부하는데 어떻게 입술로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하고 고백하고 세례까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가 보았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형제자매를 통해 전도사님들이나 목회자를 통해 ‘예수
믿으라’는 권고를 한 번은 받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학교 가는 버스에서나 전철에서든지 복음을 접하였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지금은 바쁩니다. 지금 안 되요.’ ‘저희 집은 오래 전부터 유교 집이라, 불교 신자라서 예수 믿을 수 없네요.’ 어떤 형태이던 입술로 나왔던
확실한 거부는 구원의 과정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다면 또 언제든지 믿을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찾아오는 기회가 인생에서 마지막이 됨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역사함을 최종적으로 입술로 거부하는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전하는 자와 복음을 듣는 자는 그 순간이 인생의 마지막
기회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전도를 나가기 전에 열심을 다해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심령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마지막임을 알고 받아들이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기도가 끊어지면 안됩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역하는 말은 결국 불신자들에게 가장 우선으로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내에도 이런 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생각으로만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교회는 출석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분들입니다. 십자가를
믿지 못합니다. 내 죄를 대신해서 죽은 예수가 정말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흘림으로 내 죄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입술로 아직도 고백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두 분류의 사람들에게 결론은 같습니다. 이들에게는 구원이 허락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삶의 태도는 아직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성령을 거역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운데, 우리 주변에, 내 가족들 가운데 이런 분들이 아직도 있다면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여 놀라운 구원의 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