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4): 삼위일체 되십니다
마3: 16-17, 마28:19
다음 주 8월부터는 우리 삶에 직접
관여하시는 성령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어려운 주제이긴 하지만 성도가 알아야 하는 삼위일체
되시는 성령님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령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는 분이 의외로 많이 계십니다. 심지어 구약의 천사들이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 역시 하나님이심을 증명합니다. 우선 고후 13:13절을 보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바울은 성도를 축복합니다.
마 28:19절도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성도에게 세례를 줌으로서 하나님과 예수님께
돌리는 신적인 영광을 성령께도 동일하게 돌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하나님 되심은 성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동등하게
성령 역시 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통해 증명될 수 있습니다. 먼저 시 104:30을 보면, 주의 영이(성령) 창조에 참여하십니다.
31절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만이 창조자 되심을 찬양함으로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이 시편 구절은 성령이 창조주라기보다는 창조에 참여하는 협력자 정도로 보여질 수도 있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욥33:4절은 좀더 분명히 창조주 되시는 성령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셨고 전능자의 호흡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지요” (쉬운성경).
사 6:9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행 28:25-26절에서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여러분의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은 진리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과 초대교회는 이미 성령님을 동일하신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성령에 대한 믿음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고자 합니다.
렘 31:32절을 보면, ‘여호와가 말씀하신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용한 히브리서3:7-9절에서는 이 말씀을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행 5:3절에 의하면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4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성령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가지신 속성들인 전지 전능하시고, 어디에나 계시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성령은 성자와 함께 하나님 되심을 성경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의 모든 교회와 성도가 고백하는 동일한 믿음입니다.
둘째,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다른 세 신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세례 장면을
보면 삼위일체에 대해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이 발견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따로 언급합니다. 게다가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위치하는 곳도 하늘, 땅,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나타납니다.
이런 세 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우리들로 하여금
성부, 성자, 성령이 분명 인격적으로(삼위) 존재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함입니다. 단순하게만 보면 성부와 성령 그리고 성자의 다른
세 신적 존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이렇게 단순히 생각하는 한 가지 잘못된 신학적 해석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을 다른 세 존재로 각각 달리 보는 ‘삼신론적 주장’이 있습니다. 다른 세 하나님이 계시므로 삼 신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하늘과 땅과 그리고 하늘과 땅에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신론적 해석을 피하지만 또 다른 잘못된 주장
하나가 나오게 됩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만 존재하셔야 하기 때문에 성자 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피조물로 취급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유니테리안). 단지 피조물이기에 인간 수준이거나 좀 더 나은 인간 정도로 취급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단지
하나님의 활동하는 힘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면 오직 이 세상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 한 분만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엘’이 아닌 ‘엘로힘’의 복수형태로 기록됩니다. 그런데 동사 ‘창조하다’는 복수형(바루)이 아닌 단수형(바라)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시지만 한 분 하나님
되심을 설명해 주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세 신이라는 삼신론의 주장을 물리쳐 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28:19절을 보면 “baptizing
them in 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Holy Spirit”로 기록됩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 앞에 모두 정관사가 붙어 각자 다른 존재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세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합니다. 세 분은 각자 존재하기에 ‘이름들’(오노미타, 복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수(오노마)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존재하지만 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한 분 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은 각각 다르게 불리는 이름이 따로 없습니다.
단지 출 3:14에서 소개된 ‘여호와’란 이름 하나 뿐입니다. 신 6:4에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하나인) 여호와이시니.”
여기서 사용된 ‘하나’(엑하드)
개념은 가족이 몇 명이 될지라도 그들을 ‘한’ 가족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의미입니다.
셋째, 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삼위(신성의 복수성을 표현하기 위한 용어,
세 인격, 세 분)로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잘못 설명하는 신학이
하나가 도출됩니다. 이들 주장에 의하면, 한 사람이 상황에 맞게 배역을
달리할 수 있는 것처럼 한 하나님이 모양과 태도를 시대에(구약, 신약,
성령) 따라 달리한다는 것입니다(‘양태론’).
이 주장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만족시키며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설명해 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버지와 사장님 그리고
집사님이라는 직분은 상호간에 인격적 구분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 인격이기에 서로 다른 인격간의 교류가 전혀 일어날 수 없다는 모순을 보입니다.
삼위일체의 설명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한 분
하나님이 되셔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 분 하나님을 또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태론적 해석이 갖는 가장 잘못된 주장은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직접 고난 받으시고
스스로 죽음가운데서 부활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서 스스로 죽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성부 수난설’이라 부릅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죽어서도 안 되고 죽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이 되셔야 하지만 세 다른 인격을
가진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구분 되어야 하고 서로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아닌 성자 예수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성부 하나님이 죽었다’는 소리는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신 분과 그것을 받으시는 분을 성경은 분명히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믿음은 ‘한 실체이나 세 위격(인격)’이신(Una substantia-tres persona) 하나님을 믿습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구별되는 세 인격을 가집니다.
이 세 분은 서로 독점적이고 배타적이지 않게 협력하십니다. 본질적으로 지위에 차등이
없습니다. 아들이기에 아버지 보다 열등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주님이기에 하나님보다 더 늦게 존재한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주님께로부터 나와서 주님보다 열등하거나
더 늦게 존재한다는 그런 의미 역시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항상 사랑으로 연합하여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십니다. 하지만 성부는 성자가 되고, 성자는 성령이 되고, 성령은 성부가 아닌 온전한 고유성과 자율성을 가집니다. 이 모습은 교회가 다양성을 인정하며 사랑으로 하나되는 공동체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또 주
안에서 성도는 하나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각기 다른 직능을 수행해 가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늘 성부와 성자와 함께 사역하십니다. 예수님 세례 장면을 보면 성령이
주님 위에 비둘기 같이 내려 주님 위에 임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늘의 하나님, 땅 위에 서 계시는 주님,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의 성령님을 보게 됩니다. 존재론적으로 확실히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세 분이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마 28:19절의 성도의 세례에도
하나님과 성령님 그리고 주님이 함께 동참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세분이 세례에만 함께 하십니까?’ 물론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
때 모든 것을 계획 하셨습니다. 요 1:1-13절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에 의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은바 되었다고 창조주 되신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 역시 창조 장면을 보면 모든 만물을 닭이 알을 품는 모습으로 ‘수면 위에 운행하시며’ 함께 활동하는 분으로 창 1:2절은 소개합니다.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는 창 1:26절의 모습에는 ‘우리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온 우주만물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out of), 성자로 말미암고(through),
그리고 성령 안에서(in) 창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복음을 듣고 내 의지로 예수 믿기를 작정하고 난
뒤 교회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역시 새로운 창조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도의 세례에도 성부 성자 성령이
만물의 창조 때에 함께 하였듯이 이때에도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하는 분들에게 세례를 줄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선포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구원의 모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창 3:15). 그리고 실제로 아버지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십니다(요 3:16).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주님의
성육신 과정에서 잉태하게 역사하셨습니다(마1:18).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실을 믿는 각 사람들 가운데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딛 3:5절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이 친히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히 9:14절은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마지막으로 엡 1:13절에서는 성령께서 인치심으로 그 어느 누구도 구원을 빼앗을 수 없음을 보장해 주십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