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6): 세상이 가진 힘
왕상 21:1-16
성경적 세계관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오늘은 성도가 세상에서 자리잡은 자신의 위치에서 나오는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세상은 자신이 소유한 힘을 언제든지 어디에나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누구도 제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휘두른다’ 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1절을 보면 아합 왕이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자신의 궁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에 욕심이 생깁니다. 그런 마음이 생긴 때는 바로 앞 장(20장)에서 언급된 아람과의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둔 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후”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백성들은 전쟁 후 자신들의 터전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합니다. 아합 왕 역시 국가적 위기도 넘겨 안정과 여유를 누리는 때였습니다. 게다가 승리로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됩니다. 비록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겼지만 자신의 승리로 자랑하고 싶은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 입니다.
이스르엘이란 지역에 채소밭을 가꾼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대대적인 관개시설을 마련하고 각종 향료와 식물 그리고꽃과 과수를 가꿀 수 있는 왕 전용 정원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고대 왕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하는 흔한 수단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장소가 왕의 사유지가 아닌 백성의 소유지였습니다.
그래서 왕은 나봇이라는 사람에게 두 가지 거래를 2절에서 제시합니다. 왕이 다른 포도원을 주고 바꾸거나 아니면 적당한 값을 지불하고 사겠다고 제안합니다. 매우 친절하고도 공정한 제안처럼 보입니다. 나봇으로서도 손해 갈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봇의 대답은 기대와는 전혀 엉뚱합니다. 왕을 대단히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것을 금지한다는 이유입니다. 신명기 25:23절에 의하면 조상들의 토지를 영원히 남에게 파는 것을 금하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왕이 땅을 공개적으로, 정당하게, 합리적 가격에서 구입하려 할지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하나 성경은 가르칩니다. 성도는 아무리 법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물어야 분이 한 분 계신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적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아합 왕은 일개 백성도 아는 것을 모르고 제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른다기 보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해 버린것입니다. 왕이 무시한 것을 농부가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내가 가진 지위에서 나오는 힘을 아무리 정당하게 사용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제지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정체성을 잘 설정하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어떤 가치관을 배우고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진 힘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4절을 보면 아합은 답답하여 식사마저 하지 않고 침상에 눕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부부인데도 문제를 다루는 접근이 다릅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수긍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 한쪽은 무시해 버리려는 태도를 가집니다.
7절에 보면 이세벨은 식음을 끊고 누워있는 왕을 바라보며 ‘당신이 어찌 일국의 왕이냐’는 비난을 퍼부어 됩니다. ‘왕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무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왕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세벨이 가진 가치관이며 그녀가 받은 교육입니다.
왕은 절대권력의 소유자라는 사고를 이세벨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세벨이 시집오기 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왕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왕에게 전적인 복종만이 백성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치형태는 역사에서 나타났던 왕권신수설에 의지한 절대왕권의 남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당시 애굽이나 시돈 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신정정치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땅에는 비록 권력을 가진 왕이 존재하지만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통치권을 부여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권력을 누리지만 자신보다 더 높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을 다스릴 때 자신들이 만든 법이 아닌 하나님이 허락해 준 율법에 따라 다스리고 살아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더 나아가 왕이 주신 권력을 남용할 때 하나님의 뜻을 직접 전달하는 선지자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나봇이 조상의 땅을 팔 수 없었던 이유도 왕보다 더 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도 어쩔 수 없었고 백성도 왕에게 어떤 위협도 받지 않고 당당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의기소침해 있는 왕을 바라보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세벨의 대단히 위험한 시도가 시작됩니다(8-10절). 자신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거짓을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까지도 제거할 수 있다는 사고를 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적 가치관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소유하고 있느냐는 자신의 행동까지도 결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때 세상적 가치관이 하나님 말씀에 눌리도록 우리의 의지를 내어 드리는 ‘순종’의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세상 힘은 자신의 것이 수용되지 않고 방해를 받을 때 결국 술수와 거짓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데 까지 나아가게 만드는 위험한 악을 품고 있습니다. 이세벨은 자신이 가진 힘과 권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매수하고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결국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은 나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타인을 섬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도록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직장을 갖던, 어떤 지위를 가지던 여러분이 가진 지위와 힘은 주신 분의 목적을 뛰어 넘어 남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늘 우리가 가진 힘을 초과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합니다. 아합은 이미 수도인 사마리아에 왕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의승리로 우쭐해진 마음은 나봇의 포도원이 있는 곳에 별궁을 하나 더 갖고 싶어하게 만듭니다. 내 욕심이 남으로부터 방해를 받을 때 성도는 내가 가진 힘이 나보다 덜 가진 사람을 헤치지 않도록 성경적 가치관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성경적 가치관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주신 것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자녀라면 우리 모두는 또한 주 안에서 형제 자매입니다. 어느 누구도 더 가지고 덜 가지는 존재가 아니라 모두가 아버지의 사랑 받는 대상입니다. 이 가치관을 가질 때,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것을 누리고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식을 선택합니다. 만약 타인이 그렇지 못할 때 내가 가진 힘과 능력을나누어 주는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솔로몬의 판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자들에 의해 사건이 일어납니다. 창녀들이 아이를 낳습니다. 사실 아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하찮은 사람들의 사건에 왕이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에 깊숙히 관여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지혜를 자랑하거나 나도 그런 지혜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 본문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예화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좋은 보기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 이 땅에서 그것을 선한 도구로 사용해야 함을 말합니다. 반대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우리가 가진 힘을 자신들의 욕망을 달성하고 성취하는 도구로만 사용할 때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가진 힘은 탐욕과 결합할 때 죄가 싹틉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힘이 가장 안전하게 쓰임 받는 길은 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말씀으로 통제 받을 때 우리의 가진 힘은 최대의 역량을 발휘합니다.욕심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말씀이 무시되도록 우리의 생각을 전환시킵니다. 이것을 ‘유혹’이라 부릅니다. 고전10: 13에 의하면 사람이 유혹당할 때 피할 길을 내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길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말씀을 품고 계시다가 그 암송한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시고 그 말씀을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진 힘은 타인들까지도 스스로 비굴하게 만들고(아부) 인간됨을 거부하게 만드는 악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권력입니다. 이세벨이 고안해 낸 악한 생각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두 그룹의 사람들의 나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기 바랍니다.
11절에서 ‘지시’라는 단어를 보게 됩니다. 결국 장로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기위해 권력을 가진 이세벨에게 굴복하는 자기 합리화를 보입니다. 위에 권력자가 지시하는데 어찌 거부하겠느냐는 논리입니다. 자신도 피해자라는 자기 변명입니다. 그리고 나봇을 죽이는 일에 실제 참여한 13절의 불량배 두 사람은 금전적 이익 정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상적 가치관은 악의 세력과 결탁될 때 인간을 가장 인간답지 못하게 만듭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최저치의 모습을 나타내도록 몰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가치체계를 우리 속에서 씻어내지 못하면 우리도 이들과 같은 삶의 패턴을 살 수밖에 없는 자리에 몰리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 본연의 제 자리를 상실하게 만든 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죄는 힘을 가집니다. 동조자를 불러 모으고 세력을 형성합니다. 그것을 ‘악’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너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이세벨은 북 이스라엘에서 바로 이런 악의 세력을 형성하는 장본인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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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 작동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한 곳을 세상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그곳을 지배하는 가치관이 우리에게 자리잡으면 우리도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에서 모든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죄의 자리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
성도는 성경적 가치관으로 세상을 메우어 나가야 합니다. 말씀을 직장과 실험실과 교실에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적 가치관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간을 성경적 가치관으로 사는 복된 성도가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