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5): 성도의 삶에 관계하십니다
행 1:2, 5, 8, 16
성령 시리즈를
마태복음에서 사도행전으로 옮겨 우리 삶에 직접 관계하는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주님은 지금도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2절에 ‘성령으로 명하시고’(개역, 개정)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공동번역은 “성령의
힘으로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신”으로 번역합니다. 새번역은
“성령을 통하여 지시를 내리시고” 그리고 현대인의 성경은
“성령으로 여러 가지를 지시하신” 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편, 영어성경은 ‘instruction’(NIV), ‘commandments’(KJV), 또는 “order”(NASB)
등으로 번역합니다.
원어에는
한국 번역들이 추가하고 있는 ‘여러 가지’라는 의미의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아마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한국말 번역들은 ‘여러 가지’라는 단어를 넣어 번역을 시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어에 ‘명령’이라는
단어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기에 오히려 ‘여러 가지’라는
단어를 번역에 추가 시키는 것이 더 어울리긴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명하신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성경 학자들은 마 28: 19-20 그리고 막 16:15의 주님의 지상 명령으로 봅니다. 그러나 1절에서 이어지는 전체의 문맥상(“예수께서…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명령들은 단지 최후의 지상명령 하나라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 1:2절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주님은 여전히 성령을 통해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관계하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실가요? 우리에게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면서(‘대화’) 더 구체적으로 지시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대면하시며 그들에게 말씀으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주님을
얼굴을 대하는 것처럼 만날 수는 없습니다. 금방 드린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면 이런 것들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우리들의 질문에 주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 답을 해 주었습니다. 성경을 읽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구체적인 질문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누구와 결혼해야 하고 두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할까요? 이런 복잡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매일의 삶에 대한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바로 이때 주님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응답해주시기 위해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함을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은 지금도 믿는 자들에게
충만함을 허락하십니다. 5절을 보면 예수님은 장차 사도들이 ‘성령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약간 혼돈이 옵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행1:5절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 세례가 행 2:4절에서 실제 사도들에게 일어날 때는 ‘성령
세례’라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고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헷갈릴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답부터 알고
간다면 이 천년 전 오순절에 내린 성령 세례를 성령 충만함으로 알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령 세례에 대한 오해들이 있습니다. 성령 세례가 특정인에게만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주님을 따르고 보았던 사람들에게만 성령 세례가 있었다면 ‘나는 그런 성령 체험을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분류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미 2천년 전에 임하였기 때문에 다시는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그런 성령
세례는 없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는 ‘방언이
동반되지 않으면 성령 세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는 우리 모두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이 없어도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우리 속에 이미 내재해 계십니다. 단지
내재한다고 해서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이미 거듭난 사람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8:12, 16). 이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고전 12:3절을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성령이 있지 아니하고는 우리가
입으로 주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하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믿어지는 사람들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계십니다(고전 3:16).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할 때 일어나는 내면의 현상들이 행 2:3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여기까지는
성령 충만함을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행 2:38절의
하반절에 뒤이어 나오는 말을 보면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의 선물’은 ‘성령 충만함’입니다. 그
당시 믿는 자들의 눈에 보이던 많은 성령의 선물들 중 하나는 바로 방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보여지는 것 중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단계입니다. 성령의 임재함도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성령이 충만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을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지금도 허락된다는 사실을 2:38절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의 비밀은 앞으로 사도행전을 이어가면서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고 우리도 기다리며(1:4) 기도하는
것 입니다(1:14).
셋째, 성령은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주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8절에 보면 성령이 오면 세상에 나가 주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쩌면 앞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는 이유에 대한 답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땅에
주님이 인간의 몸으로 왔을 때 많은 세상 사람들이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주님의 증인이
되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성령 충만함의 체험 없이 증인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2:1-13절 오순절 성령체험 후에 바로 베드로의 설교가 14절 이후에 이어지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들 역시 기적과 병
고침을 보고 들은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들 역시 많은 따르는 사람들과 한 가지 공통점은 약속하신
성령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오면’으로 시작합니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성령의 개인적인 임함입니다. 비록 함께 모여 집단으로 기도 드리고 있던 자리에 성령이 임하긴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위에”(행 2:3, 쉬운)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려 큰 집회에 가지만 실제 성령은 개인 개인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수가, 그곳에 모인 분위기가 우리를 성령의 임재하심의 자리로 몰고 가지 않습니다. 너무 우리가 분위기에 몰입되어 있다면 성령의 임재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됩니다.
성령 받아야
모두 주님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증인은 주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을 보고 듣고 확신한 것을 알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주님에 대해 보고 듣고 체험하였지만 믿음이 없습니다. 세상은 그저 자신들이 경험해서 믿을 만한 것, 역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고에서 만들어진 것, 철학을 나눌 뿐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습니다. 죽은 것들의 이야기뿐입니다. 아무도 살지 못했고 다들 죽어 간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세상은 또한
공허합니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그들을 붙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의 공허한 세계를 채워 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가정(전제)을
가지고 전개 합니다. 어느 하나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없습니다. 어제
발표된 것들에 대해 오늘은 반대 의견이 쏟아지고 혼돈으로 몰아갑니다.
미래가 불안한
세상에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약속대로 죽음가운데서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죽음으로
마치는 인생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생을 얻을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주님을 통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증거들이 내일을 사는 성도의 삶의 이유이며, 잘
안 되는 것도, 아픔도, 고난도 이겨 낼 수 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지금도 성령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에 대해 미리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16절을 보시면 성령은 다윗을 통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 사람임을 무려 천년 전에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일에 대해 성령은 성도에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말씀대로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질 일들은 미래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종말의 시련과
고난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마지막의 주님의 승리입니다. 성도의 환난 보다 성도가 얻게 될 축복입니다. 육신의 죽음보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령은 미리 말씀해 주시는 것은 종말의 때를 사는 우리들을 담대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앞에서 성령은
우리를 증인으로 만든다고 말씀 드렸는데 사실 증인(martures)이라는 말은 순교(martus)라는 그릭 어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증인은 죽음을 각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수 많은 목회자나 선교사들이 위협 앞에도 굴복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제 테러가 어느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파리
시골 성당에서 IS에 의해 신부님이 살해 당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세계 어느 곳을 갈 때 지나가는 공항들에서 언제 어디서 테러를 당할지 모르는 그런 시기에
살아갑니다.
성도님들
어디 선교 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직업을 구해 가는 세상의 어디에나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여러분 살려고 합니까? 어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먼 시간에 일어날 것들을 미리 성령은 말씀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증인으로 서야 할 때를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돌을 맞으며 죽어가는 스데반을 보시기 바랍니다(7:60).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마저도 용서 할 수 있는 사랑을 우리 성도님들은 준비해 두고 살아가십니까? 이런 준비는 성령을 체험할 때 준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기꺼이 그 시간이 왔을 때 맞이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에게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개인의 죽임을 맞이하는 종말이나 주님이 오셔서 이 세상을 마지막 되게 하는 시간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리
성령이 말씀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을 정말 기뻐하며 기다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가롯
유다의 앞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워하거나 죽일듯한 눈으로 쳐다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용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일들 가운데 말씀해
주시는 것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했던 분들 용서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성령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