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7): 화려함만 추구하지 마세요 

왕상 22:29-38

 


오늘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세상적 가치관 중에서 화려함이라는주제를 다룰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만드는 화려함의 모습을 바라보며 성도의 삶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첫째, 한 인생이 태어나서 이루어 놓은 찬란한 화려함은 세상은 그것을 위대한 업적이라 부릅니다. 먼저 아합 왕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당시 제국으로 부상하던 아람을 두 번이나 전쟁으로 꺾어 버립니다. 다른 군사적 승리는 왕하 3:4절에 소개됩니다. 동으로 요단을 건너 모압을 정복하여 국토를 더 확장합니다. 모압으로 매년 어린 양 십사만 마리와 숫 양 십만 마리의 양 털을 조공으로 받게 됩니다. 이런 대 승리는 국가 위상과 국민들의 자부심을 높였습니다. 더 나아가 백성들에게 평화와 더 많은 부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합 왕은 시돈과의 정략적 결혼을 통해 군사적 이익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게 됩니다. 두로는 북이스라엘로풍성한 곡물을 수입하여 식량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애굽과 이어지는 광대한 영역의 상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통관세와 관세를 부과함으로 경제적 이득을 축적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렇게 모은 돈을 자신의 새로운 수도인 사마리아를 건설하는데 사용합니다(왕상 16:24). 그 성이 얼마나 화려하게 치장 되었는 가는 오늘 읽은 본문 39절에 의하면 상아로 장식되어 있다고 합니다.

 

특히 아합은북이스라엘에 종교의 부흥을 이루어 냅니다. 이방 종교인 바알을 도입하고 국가 종교로 까지 인정하게 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종교의 자유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또한 바알 제사장들을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 잘 이용하는 재치도 발휘합니다. 바알을 잘 섬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다른 나라와 평화를 유지하며, 부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다고 왕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의 공적을 자랑하는 훌륭한 정치적 도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합은 비록 자신의 성격이 매우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긴 했지만, 당차고 결단력이 있는 이세벨의 정치적 도움으로 백성들 위에 군주가 위치한다는 강력한 왕권을 이루어 냅니다. 또한 자신의 딸을(왕하 8:18)) 남유다에 시집 보내 교류를 진전 시키고 두 나라 사이에 정치적 안정을 꾀하게 됩니다. 남과 북이 대치 국면에서 평화를 조성하여 전쟁 비용을 줄여나가는 시기를 만들게 됩니다.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군사적,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누리며 이스라엘을 고대 근동에서 다윗과 솔로몬 이후 가장 부상 시키는 화려한 업적을 남기데 됩니다.

 

문제는 너무 화려한 인생의 업적에 치중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누를 범하게 됩니다. 일 평생 이루어낸 화려한 업적들이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낸 것이 아닐 때 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둘째, 세상의 화려함은 모두 성공으로만 이어진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죄를 숨기고 악을 감추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주전 722년에 멸망하기 까지 모두 19명의 왕이 세워지게 됩니다. 모두 9번의 쿠테타 중에서 아합 왕조는 아버지 오므리가 4번째 쿠데타를 통해 이룬 왕조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북이스라엘왕 모두 100%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으로 성경에 기록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에게는 칭송을 받고 영웅으로 취급된 왕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유독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으로 취급될까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진실에 도달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과 최종적으로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하나님만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인간은 보는 것이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속까지 보시기에 최종 심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아합을 평가할 때 다른 왕들에게 부각된 죄보다 더 과중한 죄가 언급 됩니다. 왕상21:20-26을 보면 아합 스스로가 나쁜 짓을 너무 자주한 사실과(25), 심지어 아내 이세벨이 시키는 대로 나쁜 짓을 한 것이 하나님을 화나게 만들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입니다(22). 26절에는 우상을 섬기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결국 아합은 자신이 스스로 너무 많은 죄를 짓고, 남이 시켜서 죄를 짓고, 그리고 남을 죄 짓도록 만드는 장본인이 됩니다. 더구나 가장 큰 죄로 여겨지는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었고, 바알신의 도움으로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일생 동안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한번도 갖지 못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도 너무 화려함만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성실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내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섬기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내게 주어진 직무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매 주일 성실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 내시기 바랍니다. 주 앞에서 성실함이 우리 신앙의 화려한 거품을 제거하는 좋은 신앙 습관입니다.사람들은 인생의 화려함에 빠져 있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빠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나를 보시며 정직히 행하였다고 선포하는 주님의 음성을 꼭 듣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인생의 화려한 업적을 이루어 낸 그 사람도 자신의 목숨 앞에는 비열함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30절에 아람과의 전쟁에 임하는 아합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합은 전쟁에 임하는 날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비열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적군에게 표적이 되기 않기 위해 왕복을 벗고 일개 군인의 옷으로 변장을 합니다.

 

이런 별난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하여 주어졌기 때문입니다(17). 이스라엘이 패하고 왕이 죽게 될 것을 말합니다. 18절에서 자신에게 한번도 좋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선지자를 향해 불평을 하는 아합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축복만 하는 신이어야 한다는 논리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다른 예언자들을 모아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거짓 영을 주어서 오히려 전쟁에서 이긴다는 거짓말을 하게 만듭니다(22).아합 왕은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더 믿게 됩니다. 그래서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고 죽지 않을 만큼만 빵과 물만 주도록 명령하게 됩니다(27).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마저 자신이 살리고 죽일 수 있다는 교만에 빠집니다. 그때 미가야가 마지막으로 28절에서 그가 죽을 것을 다시 확정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은 전쟁터에 도착했을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인생의 화려함이 죽음마저도 화려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이루어 놓은 업적이 대단할지라도 죽음은 아합을 겁먹게 만들었습니다. 살 수 있다면 비굴하게라도 살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합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화려한 한 때의 인생보다 죽는 순간 주어질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함을 알게 합니다. 왜 사람은 죽음 앞에 두려워할까요? 다시 주어지는 시간이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할 수 있다면 마지막까지 피하다 인생의 마지막이 비굴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 11:25-26).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주이심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만이 죽는 순간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이 허락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의 화려한 나의 삶이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세상 종교가 사람들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화려한 인생이 죽음마저 화려한 곳으로, 낙원으로 인도하게 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아합 왕의 죽음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아합의 죽음은 너무 비참합니다. 우연히 쏜 한 병사의 화살에 맞아 많은 출혈로 죽습니다. 화려한 인생의 업적을 이루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아합의 죽음은 너무 화려하지 못합니다. 상아궁이 아닌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의 자리는 그가 탔던 병거였습니다. 아무리 호화롭고 화려한 궁에서 살았어도 결국 죽음은 그가 누울 땅만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화려함은 거기까지 입니다.

 

인생이 사는 동안 만들 수 있는 화려함은 자신의 계획과 노력으로 이루어 냅니다. 그러나 죽음부터는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인생의 업적은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마지막 화려한 죽음의 연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기에 어느 누구도 화려할 수 없습니다. 화살이 숨으려고 하는 아합을 정확히 찾아내듯이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든 사람이 죽는 순간 이어지는 영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아합이 이렇게 죽을 것이라 고는 어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개들이 와서 그의 피를 핥았습니다. 아합 왕의 처참한 죽음은 그의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죽음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죽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의 죽음에서 한 가지 더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아합과 아들, 그리고 이세벨이 죽는 장소가 동일합니다(왕상 21:19, 왕하 9:25, 36). 그들은 시간은 다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는 동일했습니다. 참 의미가 깊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처참하게 죽었다는 것은 영원한 죄에 대한 심판을 나타냅니다. 죄인들이 동일하게 갈 수 밖에 없는 한 곳인 지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기 바라십니다. 주님도 화려하게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고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누추함을 좋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 구유에서 나시고 당시에 가장 천대 받던 목동들의 환영을 받은 것은 어떤 위치의 인간으로 이 땅에 태어나더라도 우리는 가장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유에서 난 아이가 메시야 인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인간이 누리는 화려함이 하나님의 영광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화려한 삶을 살던 못 살던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상아궁의 화려함을 누리지만 추구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영광 위해 이 땅에서 세워주신 교회를 위해 쓰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함 보다 주의 영광을 위해 살기를 결심하고 그렇게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