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8): 즐거운 신앙생활 

왕하 1::1-8, 17

 


성경적 세계관을 시리즈로 다루는 것은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즐거운 신앙생활을 이 땅에서 이르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 즐거운 신앙생활이 되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어느 날 아하시야가 이층 난간에서 떨어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아버지 아합 왕이 지은 사마리아 상아궁에서 파티를 하다 일어난 일로 추정됩니다. 물론 왕의 주치의가 치료를 했지만 낫지 않고 병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병으로 죽게 될 것인지를 알고 싶어 은밀히 사람을 보냅니다.  

 

은밀하게 처리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절을 보면 아합 왕이 죽자 바로 모압이 배반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일국의 왕이 아픈 사실은 국가비밀 입니다. 대외적으로적국에게나 아니면 종속 국가들로 하여금 침공이나 배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이 쿠데타가 많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치적인 적들에게 기회를 주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는 이런 두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의 신복인 내시들에게 조용히 일을 처리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 사실을 엘리야가 알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 엘리야는 대단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3절에서 소개됩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엘리야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한 분은 엘리야도(말씀을 전하는 자) 아니고 천사도(하나님의 심부름꾼)아니고 바로 하나님(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계획도 다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즐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악한 계획들을 알고 계시는 분이 우리 죄를 알게 하여 회개 시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의 선한 계획을 아시고 동행하여 주십니다. 성령이 함께하셔서 늘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게 하고 돕는 사람들을 보내어 협력하여 선하게 이루실 것을 믿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기에 성도는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 성도는 세상살이에서 어려움이 발생할 때 하나님에게만 그리고 가장 먼저 그분을 찾을 때 신앙생활은 행복해 집니다. 그 기회를 빼앗길 때 주님은 대단히 서운해 합니다. 믿음이 있다-없다는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살면서 만나는 문제 앞에 초동대응이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하나님이 아닌 점쟁이에게 달려 가십니까? 아니면 귀신들 달래려고 무당을 찾습니까? 아니면 말도 못하고 스스로 걸어갈 수도 없고 사람 어깨에 매여 가고 사람이 만든 우상에게 돈 가져가 허리를 굽히십니까? 세상은 이것들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아하시야의 신앙생활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불량한 면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시들을 은밀히 보낸 곳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서 난간에서 떨어져 생긴 병으로 자신이 살 수 있는지 아니면 죽을 것인지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찾은 에그론의 신 바발세붑이 과연 어떤 신인가가 중요합니다.

 

에그론은 블레셋의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바알세붑이라는 의미는 파리들의 바알파리들의 임금이라는 의미입니다. 파리들의 임금인 우상에게 가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인간의 연약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인간이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종교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함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타난 삶입니다. 종교는 가공품이지만 신앙은 자연산입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삶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기고, 걷고, 날아다니고, 헤엄쳐 다니는 것들에게 뛰어가 자문을 구했을까요? 아닙니다. 아담은 늘 그와 함께 거닐며 이야기해 주시는 하나님에게만 달려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움입니다. 정상입니다. 옳다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맞는 것, 옳은 것, 죄 없는 것 그래서 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의로운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찾아가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이것을 십계명 중에서 처음에 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문제를 접할 때 가장 초기대응을 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자연스런 모습입니다이 자연스러움이 깨어질 때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반응해 주신다는 믿음 때문에 즐거운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종류의 구하는 사람에게 반응하십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구원을 요청하는 자에게 즉각 반응하십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언급되는 히스기야 왕이 좋은 예입니다(38).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아닌 다른 신에게 의존하는 자에게도반응하십니다. 이 예는 오늘 아하시야 왕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아니 반응하지 않고 무시해야 정답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하시야가 은밀히 보내는 사자들에게 엘리야를 급하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바알세불이 대답하기도 전에 미리 4절에서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아하시야는 자신의 죽음 앞에 미신을 선택합니다. 미신은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다른 신에게 의존하여 그것을 바꾸려는 행위입니다.그런 아하시아에게 하나님은 즉각 응답하십니다. 4절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많이 들어본 소리 아닙니까? 이것을 들려주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목숨이 다해 죽는 육신의 죽임인 죽으리라가 아니라 죽은 후에 심판 받는 제2의 죽음인 영원한 사망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인 지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날에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동일한 의미입니다. 선악과를 먹었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숲에 숨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는 죄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영원히 차단된 시간과 공간인 지옥이 그때부터 인간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힘들고 처참한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지옥 같다고 말합니다.한번도 가보지 못한 지옥을 현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죽음 이후에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영원히 이어지는 곳이 실제 지옥입니다.

 

실제로 지옥이 존재하기에 하나님은 우상에게 물으려 가는 사람에게도 성도를 보내어 복음으로 즉각 응답하십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한 사람도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아하시야는 악한 왕이지만 그도 조상들의 언약 안에 있는 언약의 자손입니다. 그래서 그가 회개하고 다시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하나님은 즉각 엘리야를 통해 반응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 그냥 맡겨 버릴 때 기쁨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뼈가 부러지거나 아니면 심한 내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의술로 고칠 수도 있지만 더 이상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관하는 영역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 수고했지만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결정에 순응하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결정에 다른 어떤 것을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입니다. 미신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할 때 생겨납니다. 사주팔자를 이용해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들을 달래 인간이 요구하는 복을 받아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이 우리의 미래를 말할 때 그렇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맞출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맞추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리라 하면 죽고, 살리라 하면 사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과연 나는 순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죽이는 일이든, 살리는 일이든 하나님의 뜻이면 따르겠습니다가 정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결정이 항상 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영원한 생명이 있어 손해가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면 다 죽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신입니다. 미신은 어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영원히 살겠다고 반항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반응은 자유입니다. 인간이 반항해서 심판을 피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불행히도 결과는 죽어서 한 번 더 망하는 사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망을 성경은 지옥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믿는 자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낙원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이유입니다.

 

나아가 죽음도 기쁜 것이 신앙입니다. 죽음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안됩니다. 육신적 죽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죽지 않고는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낙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육신이 죽는 죽음의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죽어서 들어가는 곳은 아담이 살던 이전 것인 에덴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운명을 바꾸기 위해 점치는 신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도록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를 달래 원하는 바를 달라고 졸라 되는 신도 아닙니다.신앙은 하나님이 화내실 때 나의 잘못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 되고 즐거운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우리 코넬한인교회 온 성도가 즐거운 신앙 생활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