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8): 성령 공동체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행2: 42-47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를 시리즈로 나누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 땅에서 성도가
성령 공동체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이 공동체는 믿음의 사람들을 세상과 차별화시키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이런 것들이 행해지는 곳을 교회라고 불러야 한다는 가르침이 생겨 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첫째, 성령 공동체는 삶의 중심에 예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합니다.
인간이 만든 신들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42절을 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예배 모습이 나타납니다. 4가지 초대교회 예배 요소들이 발견됩니다. 가장 먼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요즘시대로 말한다면 말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공동체에는 유대교에 뿌리를 내린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이 차이가 나는지를 가르치지 않으면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으며, 인간을 위해 무엇을 했으며,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는지,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철저히 가르쳤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이런 것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워 했고 신기해 했습니다.
가르침을 받을 때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잔인하게 남의 나라 침입해서 약탈하고 죽이는
그런 짓은 하지 않고 사는 선량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무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 죄인가를 깨닫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전달될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라는 것이 너무나 그들을 죄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용서의 길이 제시 되었습니다. 부담감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고 소망에 찬 삶을 살아가는 복음이 제시된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부담감이 있었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에게 부담을 들어내 주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메시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들었던 말씀들을 주로 들려줍니다. 이 땅에서 자신들에게 보여주었던
예수님의 모습과 하신 일들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마쳐지면 성도는 서로 친교를 나누고 다시 다락으로
올라가 식사와 함께 하는 성찬(현대인의 성경)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로 헤어지며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 ‘칭송받는’ 사람들로 변화되어 갔습니다(47절).
둘째, 성령 공동체는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사와 표적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나는 현장입니다. 43절을 보면 초대 성령공동체는 방언이나 불치병자들이 치유되고 귀신들이
쫓겨나는 이적과 기사가 많았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은 기적을 좋아할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먼저 생명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서 육신적인 생명을 갖고 있어야
그 다음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영접하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하나님은 아담에게 불순종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후에도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었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도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낫게 했다고 하는
기록이 마 4:23-24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을 만나 한 사람 한 사람을 믿음을 심어주시고 그 믿음에 기초해서
치유하는 것과 다른 모습도 분명히 있습니다. 대부분은 상처와 질병과 아픔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그저 나아
돌아가는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를 알고 영접하는 일은 일단 나중
제자들에게 맡겨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환자들은 처음에는 치유만 받고 갔습니다. 하지만 나중 제자들이 갈리리와 데가볼리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거너 지역까지 복음을 전해주게 됩니다(마 4:25). 그때 그들은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손을 내밀어 낫게 한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세주였음을 나중 아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지 기적을 경험하고 육신적인 병만 고침 받은 그 영혼들이
나중에 구원받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 예수를 아는 놀라운 일이 더 많이 발생했기에(2:40-41)
성령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손을 얹을때 기적이 일어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매우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합니다. 성령 충만함이 있고 믿음의
사도들이 현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계속 그런 형상들이 지속 되었을가요?
아닙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초기에 많던 기적들이 후반부에는 주님
사역의 중심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도 십자가에서 구원하지 못한다는 소리마저 십자가에서 듣게 되십니다. 사도행전도
뒷장으로 넘어 갈수록 기적의 수는 줄어드는 현상을 보여줍니다.
이적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2:22). 이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주려고 했던 것은 구원이었습니다(2:40).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베부름과 치유의 기적만을 원하였지
예수가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에는 관심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결국 믿음이 없어질 때 사도행전에서 기적이 점점
사라져 간 이유일 것입니다.
세째, 성령공동체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관심과 실제적인 도움을 줍니다. 44-45절을 보면 힘든 사람들에게 대한 관심과 나눔이 말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서로 내것을 아낌없이 나눌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사실 로마로부터의 핍박도 있어지만 핍박의 시작은 어쩌면 유대인들로 부터라고 말해도 틀린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 대부분은 거의 유대교로부터 나온 사람들입니다. 유대교인들의 눈에는 배교였습니다.
계속 유대 공동체에 속하고 물건을 통용하는 일이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44절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어디에도 받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기 위해 모여 들었던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이들이 살아가도록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 일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4:36-37절에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직업을 찾아 가기 전에 일정기간 함께 모여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것을 서로 통용하였던 것입니다(44절).
나눔은 먼저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관심도 없는데 그 다음 단계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뉴스를 접합니다. 가슴아픈 사건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도울 생각조차 못(안)합니다. 생각한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나의 기도의 자리에 그것을 가져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선정하시고 목표를 세워 올해에는 이 일을 돕겠다 결정하기 바랍니다.
본인이 해도 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교회가 하는 구제와
봉사의 일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년에 교회가 유티카 지역 난민사역을 드디어 시작할 것입니다. ‘7월 방학이라 많은
분들이 이곳에 남지 않는데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걱정이 안됩니다. 그냥 우리는 재능이 있으면 재능으로,
시간이 있으면 시간으로, 물질로 주의 사역에 동참하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사역을 도와주실 시라큐스 교회가 어떻게
진행하는 지에 대해서도 팀들이 와서 우리들에게 알려주게 될 것입니다. 미리 마음에 결정하시고 무엇이든 처음으로 하는 일에 많은 은혜가 있음을
믿고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세워지게 될 비전센터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는
공동체로 만들어 가기 바랍니다.
이곳을 떠나는 분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두시면 오시는 분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활용될 것입니다.
남기시는 것들 중에서 작은 물건도 포함하지만 사용하던 자동차들도 남겨서 정말 필요한 학생들에게 다시 흘러 가도록 도네이션하는
것까지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공동체는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되어 움직이는
곳입니다. 46절 상반절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라는 구절입니다. 부부도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면 집이 엉망이 됩니다. 교회도 성도가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가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이 이뤄지면 좋을 것입니다. 교회 성도가 한 분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100명이 넘어가고200명이 넘어간다면 어떻게 될가요? 물론 다 각자 생각이 다를수도 있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그런 분들이 그룹을 이룬다면 교회에는 몇 그룹이나 만들어
질가요? 두 개 이상은 만들어 질 것입니다. 본인들과 그리고 나와 다른
그룹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생각을 하는 그룹들이 생겨난다고 해도 여전히 한
마음이 안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날마다 한 마음’으로 초대교회 성령 공동체는
사역을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비결은 정말 모두가 다 한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방향이 될 때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성경공부를 한다면 어떤 분들은
교리를 배우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분들은 교회 역사를, 또 다른 그룹은 자신들이 나누는 성경공부를 원합니다. 정말 다양할 것입니다. 다양한 것을 제공할 수 있는 시간과 인력이 되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마음이 될 수 있을가요? 생각을 같게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는 주님을 더 알아 닮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이 생각을
가질 때 내가 하고 싶은 것 안해도 다른 것도 주님을 알아가고 배워가는 것이기에 남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수긍할 수 있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내가 가고 싶고,
아는 선교사님들 돕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지역과 선교사님들이 아니더라도
결국 선교에 동참하게 되면 나중에는 몰았던 그분도 내가 아는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뒤로 해 보시고 교회 리더십이 성도들을 만나 의논하고 기도하고 하자고 하는 일에 힘을 다해 참여하는 것이 바로 마음이 하나되는 교회입니다.
남을 위해 내것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내것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남들이 내 것 마음대로 사용해보세요. 짜증날 것입니다. 나중에는 참다 폭발할 것입니다. 그러나 46-47절 처럼
하나님을 찬미할 때 우리 마음은 기쁘고 순전해 집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높일 때 바로 이때 나와 너 사이에 담은 무너집니다. 모두가 주 안에서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일이 나의 일이 되어 서로가 힘들면 돕고 서로를 이해하며 마음이
하나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오신 가족들과 온 성도들이 가족수련회에 참여해서
마음이 하나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나고 체험해 보는 복이 다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