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9): 잘 안 풀려 나갈 때
왕하: 3:1-17, 26-27
살다 보면 잘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쉬운 것이 원망입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주위 환경을 원망하고 그리고 자신을 원망하고, 모든 것이 원망으로 가득 찰 때가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왕 여호람도 자신의 일이 잘 안될 때 하나님 앞에서 원망하는 모습이 두 번이나 나타납니다(10, 13절).
첫째,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 한 것이 있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잘 안 도와줄 때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람은 아버지인 아합 때에 성행하던 바알 주상을 제거합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대단한 영적 부흥입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3절을 보면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런 모습이 반짝하는 분위기였음을 뜻합니다.
여호람은 잠시 바알 우상들을 제거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모습으로 나라를 12년 동안(1절) 다스리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부모와 같이 바알을 국가 종교로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장려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초기부터 이어지는 여로보암의 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은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고 3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인 신앙 회복 분위기로만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엘리야에 의해 주도 된 바알 제거 운동의 영향력에 밀려 마지못해 하는 흉내만 낸 것입니다. 그리고 아하시야 왕이 난간에서 떨어져 병 들었을 때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는 모습을 보며 여호람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전해 줍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는 우리의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회개가 없는 신앙은 내가 잘한 것 만을 바라보아 주기를 원하는 왜곡된 신앙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현재 바로 서 있지 못한 신앙 생활에서(3절) 과거의 잘한 것만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잘 돌보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태도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살다가 뭔가 잘 안 풀려나갈 때 원망하지만 사실 가만히 보면 본인 자신의 철저한 준비가 없는 때가 많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런 모습은 연합군이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여줍니다. 아버지 아합이 모압을 쳐서 땅을 넓히고 그곳에서 조공을 매년 받아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습니다(4절). 그런데 아합이 죽자 모압이 배신을 했다고 합니다(5절). 아합의 뒤를 이어 잠시 왕이 되었던 아하시야가 갑작스레 죽자 여호람이 왕이 됩니다. 사실 여호람은 왕이 될 준비가 하지 못하고 왕이 된 사람입니다. 모압이 배반하자 단지 정치적인 이유로 모압을 눌러 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전쟁을 준비합니다.
단독으로 싸우기 보다는(6절) 남유다와 에돔을 끌어 들입니다(7절). 무슨 일을 할 때 준비 안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세 나라 왕들도 나름대로 철저히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이 8절에 보입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전쟁의 변수가 될 한 가지를 찾아냅니다.다름 아니라, 자신들이 공격할 때 혹시 모압이 북쪽의 아람과 연합을 할 경우를 생각해 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주력군을 북쪽에 두고 남유다와 에돔 연합군이 사해 밑을 돌아 공격하는 전술을 택합니다. 에돔 광야 길을 택하여 모압의 후미인 남쪽을 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북으로는 아람의 연합을 차단 시키고 모압을 가운데 두고 아래와 위에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버리려는 전술을 계획한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부족한 점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연합군이 택한 행군 진로였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유리한 길이었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들 세 왕은 방어전에는 강하지만 직접 성을 공격해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남유다나 북이스라엘은 모두 적들이 쳐들어오면 성 안에서 싸우는 도성전의 경험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돔 역시 높은 곳에 성벽을 쌓았기에 기병을 데리고 나가 원정을 해서 전쟁 하는 경험이 없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9절에서 지적됩니다. 연합 원정군이 먹을 밥 보다 물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에돔 광야 길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일교차도 심하지만 물이 거의 없는 곳입니다. 이들은 7일 동안 가야 했는데 물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잊고, 이기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보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상된 일이 일어난 것이므로 원망할 이유가 사실 없습니다. 하나님이 돕지 않아 실패한 경우 원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들이 정말 철저히 준비하지 못해 낭패를 당할 때 원망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 7:7에 우리가 직접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철저하지 못한 자신의 준비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어리석음이 우리 삶 가운데 없기를 바랍니다.
셋째, 우리 인생 가운데 원망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승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교재하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도전 드립니다. 10절에서 여호람은 연합 사령관 중에서 원망의 주역이 됩니다. 그러나 11절의 남유다 여호사밧은 조금 다르게 대응합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야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느냐?”고 묻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물어야 된다는 기본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북이스라엘 왕 때문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남유다 여호사밧 때문에 왕을 보러 나왔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기본이 안되면 안 된다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3절에서 엘리사가 기본이 안된 여호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으십니까? 당신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 가소서.”라고 매우 냉랭하게 그를 대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자기가 힘들고 어려울 때 도깨비 방망이처럼 나타나 도와야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들을 만들고 계시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방학이라 쉬고 있지만 학기에는 매 주마다 목장 모임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시고 그 모임을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가정과 개인에 놀라운 축복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모여 주님의 이름으로 가정들을 축복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는 반드시 하나님이 문제를 풀어 주십니다. 15절에 거문고를 타는 사람과 함께 기도할 때 엘리사에게 말씀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기도할 때 해답이 주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17-18절).
다들 좋은 이야기, 좋은 소식만 축하하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정말 죽을 것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신실한 자들이 모이는 기도 모임에 시간을 내어 참석해야 합니다. 이것이신앙생활입니다. 주일 날 예배 전 12시에 룸 314에 모여 1시간 동안 있는 중보 기도 팀에 조인하시기를 강추 드립니다. 남을 위해 먼저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이 내 기도는 책임져 준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도전해 보시는 성도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일이 진짜 잘 안될 때는 온전한 믿음 대신 미신적 요소가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때 미신적 신앙이 주는 두려움을 극복하셔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뜻을 이루어 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처음 예수 믿는 분들이 잘 안 될 때 내가 믿던 신이 진노했나 뭐 이런 것입니다.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연합군에게 승리 할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마른 골짜기를 파서 개천을 이룰 정도로 물을 얻은 연합군은 물을 마시고 소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제 이루어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들이 있는 지역에는 비가 없었지만 다른 지역에서 온 비가 땅으로 흡수되어 흘러 가는 물길을 골짜기에서 파서 찾아 낸 것입니다.
게다가 개천이 없는 곳에 물이 흘러 아침에 비치는 햇살 때문에 그것이 피로 보였습니다. 모압군은 연합군을 기습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 났다고 22절에서 말합니다. 그런데 모압 지휘부가 오판을 합니다. 햇빛에 비친 붉은 물이 연합군이 밤새 서로 싸워 죽여서 피가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모압군들은 너무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절대로 물이 흘러 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오판을 한 모압군은 파죽지세로 몰리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연합군은 많은 성읍들을(25절) 치고 나갑니다. 그러나 모압의 수도 가까이(27절,성) 도착하자 예상하지 못한 난간에 부딪힙니다. 모압 왕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신을 달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27절을 보면 왕위를 이을 맏아들을 데려와 성 위에서 인신 번제를 드립니다. 아니나 다를까 연합군이 그들을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닌 신도 믿을 만합니다. 적들이 물러가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 해답이 우리의 올바른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압을 이스라엘에 주셨다고 18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런데 왜 연합군이 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돌아갑니까? 몇 성읍들만 굴복 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도를 장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27절에서 모압 왕이 인신 번제를 드리자 ‘이스라엘에게 크게 격노함이 임하매 그들이 돌아 갔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 일가요?“이스라엘에게 크게 분통함이 임하매”(개역), “무서운 신의 진노가 이스라엘 군에 내려”(공동). 모압 신이 뭔가 재앙을 내리는 느낌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새번역은 “그러나 이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여” 현대: “이것을 본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자기들에게 내릴 재앙을 생각하고 두려워” 라고 번역합니다.
연합군은 막판에 정말로 잘 안 되는 일이 발생하자 스스로 당황하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적들이 저 정도 헌신하면 저들의 신이 뭔가 자신들에게 벌을 줄 것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스스로 겁에 질려 포기한 것을 신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구별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닌 신들은 저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신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미신적 태도가 철저히 제거 되어야만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성경적세계관을 나누면서 아직도 갖고 있는 불 신앙의 요소인 미신과 그 미신으로 하여금 생겨난 두려움을 깨끗하게 소멸하는 믿음을 가진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