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9): 성도가 세상에 뭔가를 나타내기 원합니다
행4:1-13, 23-31
성령은 성도가 세상에서 가만히 넋을 잃고 앉아만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세상에 뭔가를 나타내기 원합니다.
첫째, 성령은 세상이 성도에게 가하는 핍박을 보여주며
세상의 악을 드러나게 하십니다.1절을 보시면 사도들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이 언급 됩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특히 사두개인들이 왜 사도들을 싫어했는가를
2절에서
소개합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정복자 로마와 결탁하여 부와 권세를 누리던 사람들입니다. 죽음 이후 내세보다는 이 땅에서 복을 더 추구하는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믿음을 추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지금이 좋기 때문입니다. 내가 현재 돈을 가지고 있고,
지금 명예와 권력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안하기에 아예 생각조차 안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는 사도들의 메시지를 싫어할 수 밖에 없고 사도들은 달갑지 않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이 사도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4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안식일이면 꼬박꼬박 예배하러 성전에 나왔던 사람들이 갑자기 안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닌 오천 명씩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남자 수가 오천이면 여자들과 아이들 모두 합치면 2만에 가까운 수에 해당 될 것입니다.
당황을 넘어서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부여받은 종교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사도들을 잡아 가두게 됩니다.
마음대로 이들은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문중들이 다 모여 가진 힘을 자랑합니다(5-6절).
육신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갑이라는 위치를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파괴시킵니다. 금수저라는 복에 대해 한번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존재감만 높이는데 사용했습니다.
결국 성령은 세상에서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죄된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려 하십니다.
둘째, 성령은 성도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위축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상에 나타내기 원합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두 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잡고 이튿 날 모여든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았졌습니다. 수적으로 많고
더 강한 세력들이 나를 싫어할때(2절) 대부분 사람은 조금 주춤합니다.
게다가 사도들은 이튿 날까지 갇히게 됩니다. 여기서는 ‘옥’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행5:17, 12:5절에서 베드로가
잡히는 경우를 보면 감옥에 가두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옥에 갇히면 사도들도 사람이기에 실망, 포기, 좌절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믿음을 가지고 전파한다고 하지만, 옥에 갇히는 것은 잘못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런 태도를 갖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반성하고 후회하고 잘못 되었나
되돌아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뒤돌아보고, 교회 사람들이 뭔가에 미치지
않았나 생각하고, 매주 주일에 모이는 것, 물질 드리는 것 잘못 되지
않았나 헷갈려 하는 것은 이미 끝을 낸 사람들입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 답을 찾게해 주는 것이 바로 주님을
체험하는 삶입니다. 거듭남의 신앙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시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죄를
벗어 버리지 못해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나에게 찾아와 주신 주님. 그분이 나의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대신져
주시며 함께 가자고 부르신 날. 그 사랑 너무 감사하여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로 결정하고 따르시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 지신 그 고난이 너무 감사해서, 주님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죽고 다시 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세상이 복음에
대해 거는 제동에 조금도 위축당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갈릴리 뱃사람들이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최고의 지성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기만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세상 앞에서 이렇게 살아갈 줄 믿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성령의 사람들이 코넬한인교회에서 나오줄 믿습니다.
세째, 성령은 8절에서 사도들처럼 성도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 있음을 세상에 나타내기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공회원들 앞에서 사도는 자신들이 가진 인간적인 용기와 자신감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인맥과
학연 찾아 자신들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살기위한 군더더기와 같은 변명이 없습니다. 타협하려고 당장 꼬리 내리고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가진것을 갖지
못하면 부러워합니다. 이런 논리가 세상에 적용된다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성도가 보여줄 때만이
우리를 부러워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주님 주신 성령 충만함(평강)으로 이들을 대항했던 이유입니다.
13절에서 학식없는 범인인 베드로가
백성의 관리들과 공회원들을 어떻게 부릅니까? 당당히 부릅니다. 예의없게
부른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담대함을 보고 오히려 질문한 그들이 위축 당하는 분위기가 보입니다.
사도들이 가르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 자신들은 잘못을 저지런 사람들이
아니라 착한 일을 행한 것이라고 9절에서 교정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도의 성령 충만은 세상이 틀린 것을 바로잡는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때면 늘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가 사도행전에서 사용됩니다. 그 한
예가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성경적 사고관을 사도들에 이해서 보여줍니다.
죽음보다 더 큰 문제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적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기적을 보여주신 의도는 죽음보다 더 큰 주님이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죽임인 사망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보여주는 맛보기입니다.
우리는 맛보기 보다 진짜를 경험해야 합니다. 진짜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누리는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적으로 이 세상에서 치유함이 일어나지 않아도 영원히 사는 약속이 있기에
실망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이것을 13절에서
공회원들이 보고 이상히 여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기도하는 공동체임을 세상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사도들은 이틀 동안 공회에 사로잡혀 있다가 풀려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도들에게 돌아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모습이 23절에서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합니다(24절).
동료들도 두 사도들과 같이 잡힐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29절) 몰려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무리는 다 소리높여 기도합니다.
우리들도 기도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닥치는 위협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려는 사탄의 계략과(25절) 대적들을(26절)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의 뜻을 이루고(28절)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29절)
개인과 가족과 교회는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두루 돌아
다니는 사탄의 밥 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위기속에서 그 위기를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도록 하기위해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기도하게 합니다.
기도가 없는 개인, 가정, 교회, 나라는 망합니다. 25-27절을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열방을 부축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25절하). 세상의
임금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이고(26절) 이방인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까지도 미혹되어(27절) 그리스도를 대적함이 더 강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자신의 마지막 때를 알고 한 영혼이라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영적 전쟁의 때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 되심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고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없이는 종말의 때를 이겨 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능력을 가진 성령의 도움을 기도로 요청해야만 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종교가 기도 형식을 갖고 있지만 크리스천들의
기도가 그들과 다른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31절처럼 사도들이 기도했을 응답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기도를 다할 때 이 예배당이 진동하고
다 성령 충만함을 얻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