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0): 구분하십니다
행 4:33-5:11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를 나누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영적 부흥을 이루어 오다가 큰 사건을 하나 맞이하게
됩니다. 한 성도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드렸는데 죽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모두가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
헌금을 하고도 죽을 수 있구나! 무엇이 잘못인가? 그러면
나도 저들처럼 죽는 것 아니야!’ 공동체가 온통 혼돈과 두려움 가운데 빠지는 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째, 이 사건에서 나타나는
성령님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뭔가 다른 것을 확연히 구분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두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칭찬으로 다른 한 사람은 죽음이라는 무서운 차이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와 아나니아 두 인물이 취하는 행동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바나바 |
아나니아 |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
1하: 소유를 팔아 |
37: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
2: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
먼저 바나바는
조상이 레위인이며 지중해 섬 중의 하나인 구브로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에 와서
살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나 봅니다.
아나니아
부부도 4:31하반절에 언급되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는 사도들의 복음전도의 열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한 사람만 믿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 예수를 믿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 보고 부부의 죽음을 풀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시고 철저히 구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믿는다는
것만 봅니다. 그리고 둘 다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만 칭찬합니다. 하지만 성령은 그 믿음의 행위들 가운데 뭔가 다른 것이 개입된 것을 구분해 내십니다. 이런 모습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4장에도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가인과 아벨 사이에도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을 스스로 구분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성령님에 대한 첫 번째 이해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인간의 내면
속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출발부터 무엇이 차이가 나는 것인가를 구별하십니다. 이 두 사람의 다른 출발이 생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바나바와 같이 혼자 결정하지 않고 부부가 함께 의논한 것이 문제가 될까요? 나중에 등장하는 아나니아 부부는 함께 의논해서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재산을 드리게 됩니다. 남편만의 결정이 아닌 부부의 합의와 결정이었습니다.
혼자 예수
믿고 많은 헌금을 교회에 내서 가정이 난리 나는 일들 한국 교회에 참 많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2천년 전 사회에서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는 같은 믿음을 가졌고 상당히 민주적인 가정의 모습을
이미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가정입니다.
5:1절에 나타나는
‘더불어’라는 단어가 결정을 하기 전에 부부가 함께 의논하고
합의하에 소유를 팔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을까요?
두 사람이
합의하고 결정해서 드리거나 혼자 결정해서 드리거나 별 차이는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금이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아름다운 드림이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부부 두 사람이 합의해서 물질을
드린 것이 더 충성스러워 보이고 보기 좋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이런 초대교회의
헌신적인 드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4:33절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증언할 때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재산을 드리는 성도들의
이런 행동은 충동적인 현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성도에게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고 그 뜻을 이해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건의
전체적인 정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적으로 바나바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이 있어 이들 부부보다 먼저
드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사도들로부터 ‘위로의
아들’이라는 칭찬받는 소문을 듣게 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바나바와 같이 자신들도 땅을 팔아 사도들에게 드립니다. 하지만 이들의 출발은 사도들에 의해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동기가 된 것 같습니다.
자신들도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인물인데 바나바가 많은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모습을 보며 질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해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5:3절의 사탄이 이들에게 개입하는 모습을 보면 ‘이 해석이 맞다’는 확신을 얻습니다.
성도는
결과가 아름다운 것도 중요하지만 선한 동기를 철저히 구분하시는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각 깊은 곳을 감찰하십니다. 이것을 믿음의 성도는 마음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할 줄 믿습니다.
셋째, 성령은 우리의 행동들이
성령의 감동인지 아니면 사탄의 역사인지를 반드시 구분하십니다. 이들 부부가 바나바와 다른 차이점은 처음 생각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질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처음 결정은 시기나 질투에서 출발했다 할지라도 판 소유를 다 드리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입니다.
5:1절에 보면
일단 부부가 소유를 팝니다. 그 다음 2절에 보면 그 값의
얼마를 감추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돈을 감추는 일이 먼저 아나니아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절 후반부를 잘 살펴보면 “그 아내도 알더라”는 구절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결정하고 일단 소유를 팔았지만 차후에 아나니아의 마음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
드리지 않고 일단 어느 정도만 드리기로 다시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내가 알았던 것 같습니다. 몇 번 ‘왜 그랬느냐’ 등
말다툼이 있었지만 아내 역시 남편의 말에 수긍을 하고 둘이 합의하에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에게 내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나중 남편이 죽었던 사실을 모르고 세 시간 뒤에 다시 나타난 아내 삽비라 역시 베드로가 묻는 말에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이것을 보면 둘 다 확실히 합의했다는 것을 확신케 해줍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함께 합의했다면 함께 올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은 같이 오지 않았을 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두 사람이 같이 왔다면 둘 다 함께 그 자리에서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합의가 있었기에 둘 다 같은 답을 한 자리에서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들어온
것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어쩌면 더 주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각각 묻는 질문에는 회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답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실을 숨깁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구겨진
자존심, 체면만 숨기려 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런 행동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되고 성령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사단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다’라고 말하는 베드로의 영적
관찰입니다. 5:3절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생각을 집어 넣습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영의 세계까지 깊이 감찰하고 구분해 냅니다. 성도
자신이 잘못임을 알고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사탄이 내 생각을 사로잡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무조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 생활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든든히 서 나가도록 도움을 주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분하십니다. 본문을 보면서 두 가지 질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이
부부가 돈을 감춘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정말 돈을 숨긴 일이 하나님이 사람을 죽일 정도로 악한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사탄은
늘 인간과 합의 가능하고 현실적인 제안만 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입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에 들어갈 때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없고 물은 넘치는데 그냥 강을 건너가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넣을 때까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전혀 실현 불가능해 보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과는 대화가 안될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교활한 사탄은 늘 하나님보다 더 현실적이고 타협적인 대안을 가지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속는 이유입니다. 사탄은 이 부부에게 이런 제안을 집어 넣습니다. “아무도
모른다. 이 돈이 전부인지 아닌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숨겨둘지라도 너희들만 안다. 그리고 아이들 대학진학, 노후대책
세워 두어야 되지 않겠니?” 이처럼 현실적인 제안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런 현실적인 삶에 그들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 그런 생각 없었을까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속이며 자신이 살길을 추구하기 보다 더 하나님의 일에 뛰어 듭니다. 2:44-45절에서처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은 ‘페루지아’라는 종말사상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강하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일과 복음전파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주님을 닮는 삶이라는 두 가지 믿음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유를 전부 내어 놓은 사람들은 대부분 순례 전도자로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은 혼자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가족을 데리고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중 바나바도 행13장에 보면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모두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이 부부가 땅을 팔던 안 팔던
질투와 시기심에서 출발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다 드리던 일부를 드리던 자신들의 믿음에서 드리지
못한 점입니다.
문제는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이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차 버리고
사탄이 던진 미끼를 죽어 먹은 것입니다. 만약 이 부부의 일이 드러나지 않고 숨겨졌다면 교회는 사탄의
속임수가 난발하고 거짓과 시기가 충만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이런 것을 철저히 구분해 내셨습니다. 이것이 그가 죽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도 사탄도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인이십니다. 이 믿음을 가진 신실한 성도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