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1): 성도를 도우십니다 

5:12-21, 33-41


 

예루살렘 교회가 부흥하는 모습 한 가운데는 성령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도를 위로하시고 실제적으로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들을 때 누구를, 어떻게, 왜 돕는지를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성령은 성도가 병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도우십니다. 초대교회는 병자들이 올 때 사도들은 손을 내밀었고 많은 이적과 기적을 체험했습니다(4:30, 5:12). 이런 현상은 주님이 막 16:18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는 약속 때문입니다. 그들은 믿었고 그대로 행했을 때 치유는 일어났습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들이 마18:19, 5:14-15 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낫기를 바라고 믿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하나 더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본문 가운데서 나누고자 합니다. 15-16절에 병든 자들을 메고와서 베드로가 지날 때 그림자라도 덮일까하여 병이 낫기를 바라는주변 사람들의 적극적인 도움의 모습입니다.

 

정말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곳에는 늘 이처럼 극성스런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병상에 중풍병자를 메고 주님께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붕을 뜯고 달아내려 낫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14:36에도 주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기를 간구하는 자들은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절대적인 신뢰와 적극적인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조차도 당황하게 만들 만큼의 기발한 행동들, 그리고 절대적인 믿음이 성령님을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태도가 필요할까요?

 

옆에서 돕는 분들이 있을 때 질병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진 분들이 계속 주님 붙잡을 수가 있습니다. 아플때는 있던 믿음도 식습니다. 아픈 분들은 속에 있는 원망으로 믿음을 지켜 나가는 것을 막아버릴 때가 많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 성도님들이 아픈 분들을 위해 믿음을 일으키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현대는 사실 기적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인 의사방문과 검진 그리고 더 좋은 장비의 시설을 갖춘 병원을 찾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상황에도 하나님이 간섭하셔야 될 것들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마저 우리가 잊고 산다면 이제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힘들고 지친 분들의 믿음을 일으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성도가 위험에 처할 때 천사를 보내어 위기의 상황에서 건져 내어 주십니다.  17-18절을 보면 사도들의 능력과 기사로 인해 많은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사도들을 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신기한 일이 하나 더 19절에서 발생합니다. 주의 천사가 옥문까지 열고 사도들을  끌어내어 줍니다.

 

한 번 더 행12:7에서 베드로는 옥에 갇히고 주의 천사가 꺼집어 내어 주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베드로에게 두 번씩 일어난 사건은 모두 주의 사자가 직접 그를 찾아와 옥 문을 열어주거나 아니면 구해주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쯤 하면 여러분 속에 왜 나는 안 도와주지? 아니 요즘은 왜 천사가 안 나타나지? 천사 씨가 말랐나?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저는 답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라는 것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구해주시거나 아니면 우리들을 그냥 그 위험 속에서 죽게 하시거나 결정권자는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묵상할 것은 하나님이 그 위기의 현장에서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입니다. 천사가 안 나타난다고 원망하며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찬양하며 그리아니하실지라도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듣기 원합니다. 죽음 앞에 떨며 죽어가는 옆 친구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움 속에 빠진 사람들을 평강으로 인도하고 주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함께 위험에 처한 성도를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들보다 먼저 주님도 두 강도들을 향해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위기상황에 처한 그 현장에 있지 않기에 우리는 그 현장의 성도들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이 있음을 믿습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을 구원하는 스데반 집사의 모습을 행7:58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라 죽음 이후 사망이 얼마나 큰 아픔이고 고통인가를 아는 분이기에 다른 영혼을 위해 이 땅의 한 성도의 죽음을 그렇게 값있게 사용하십니다.

 

돌에 맞아 죽기 전에 유대인들 앞에 선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다고 6:15에서 전합니다. 마찬가지로, 수 많은 위험 가운데 함께 죽어간 성도들의 얼굴도 천사와 같았을 것입니다. 기억난느 많은 사고들 가운데서 현장의 불신자는 자신에게 나타난 천사의 도움으로 천국에서 그와 함께 손을 잡고 주의 품에 안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줄 믿습니다. 죽음의 현장에 함께하는 믿음의 사람들 그분들이 떨고 있는 불신자들에게는 천사인 것입니다.


셋째, 성령은 작은 사건 하나도 사용하셔서 복음전파에 사용하십니다. 밤에 사도들이 옥에서 풀려난 것으로 사도들의 고난이 종료되지 않았습니다. 20절에 보면 밤에 옥 문을 열어준 천사는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말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풀려난 사도들은 바로 성전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런데 21절에 의하면 그때가 새벽이라고 말합니다. 풀려난 시간은 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새벽이 되었나 봅니다. 한 숨 자고 성전에 갔다는 말도 없습니다. 게다가 숨지도 않습니다. 옥문이 열려 풀려났는데 자신들을 잡으러 올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새벽부터 성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다음 날 옥에서 풀려 난지도 모르고 있는 공회원들은 사도들을 데려오라고 21절에서 부하들을 보냅니다. 고난은 진행중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사도들을 저지하려는 유대인 종교인들도 매우 적극적이고 열심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들 역시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밤부터 움직이신 분은 성령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하루를 불신자들보다 먼저 시작하는 이유는 이 혼란한 영적 세계에 하나님의 영광이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탄이 깨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그의 머리를 짓누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는 사탄의 밥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영적 세계의 심각성을 아셔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분명 존재합니다. 세상에도 전쟁이 있듯이 믿음의 세계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지지 않도록 누군가는 파순꾼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파순꾼이 없는 성읍은 적들에 기습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적들이 성문을 열고 우리의 것을 노략질 하고 뺐고 죽일 때 그때 위급함을 알고 당황해 하지 않는 가정들이 되기 바랍니다.

 

사도들을 데리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사도들이 옥 안에는 없다는 보고를 합니다(23). 이 보고를 받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먼저 의심했습니다. 그런일이 어떻게 일어 났느냐는 것입니다. 고민합니다. ‘어떻게 이 사건이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24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6: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것은 성령님은 이 사건을 허다한 제사장들이 돌아오는 역사를 이루는 시발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심령을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교만으로 가득한 그들을 순종으로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들과 함께 하시고 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다는 마음이 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들 역시 주님을 믿게 하도록 하는 일을 이렇게 세밀하게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심지어 적들 가운데서도 우리를 돕는 자가 나오도록 도와 주십니다.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돕는 자들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천사들의 도움으로 옥에서 풀려나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유대 공회는 다시 잡아오게 합니다.  

 

공회 앞에 온 사도들이 계속 그들에게조차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30-32) 유대인들은 아예 사도들을 제거하려고 합니다(33). 이때에도 성령님은 사도들을 도우십니다. 오히려 그들 내부에서 돕는 자가 일어납니다. 당시 율법교사이며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바리새인 가말리엘이 유대 공회에 제동을 겁니다.

 

자신들의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던 인물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쇠하고 사라져 버리는 예들을 듭니다. 그리고 만일 사도들이 전하여 예루살렘 전체에 퍼져나가는 복음사역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면(39) 자신들이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대인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된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상식적인 논리와 유대인 자신들의 역사적 경험으로 사람들을 설득시켰습니다. 사도들에게는 예상하지 못했던 도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게 됩니다(40). 더 나아가 자신들이 취하려고 했던 조치보다 조금 약하게 사도들을 채찍질 하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수준에서 놓아주게 됩니다.

 

죽음으로 갈 수도 있을 상황에서 하나님은 반전을 만들어 내십니다. 그것도 반대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편에 서는 자들이 나오게  만들어 복음전하는 일이 중단되지 않도록 도우셨습니다. 사도들의 생명 위협은 초기 기독교가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령님은 이들의 생명을 살리고 복음이 전파 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 주시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직은 초대교회가 그들을 이어갈 다음세대를 준비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차세대가 나올 때까지는 사도들이 교회를 리더하고 제자들을 만드는 사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도 사도들을 적극적으로 구출해 내는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도를 돕는 분이십니다. 마음의 위로와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더 적극적으로 기적으로 위협에서 건져내시고 반대자들까지도 움직여 복음 전파자들을 도와주십니다. 성도가 복음에 담대할 때 성령님은 더욱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없이하려는 이 시대 속에서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때 성령이 돕는 강한 체험을 가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