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3): 성도를 순교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6:8-14, 7:54-60


 

교회 역사는 어쩌면 순교의 역사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많은 성도의 목숨을 내어 놓는 순교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왜 성도로 하여금 순교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지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은 성도를 순교의 자리로 이끌면서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순교는 세상이 정당하게 성도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6: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의 전도활동으로 인해 많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도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9절에 보면 스데반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출신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면서 헬라말을 사용하던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계속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현상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처음에는 힘을 합세하여 회당에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을 능히 당하지 못하였다고 10절은 기록합니다. 그들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습니다. 힘을 합해도 스데반을 이길 수 없다면 공회 역시 스데반을 죽일 구실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너무나 비열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11절에 의하면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 서기위해 거짓 증인을 준비합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거짓말을 하도록 사람들에게 돈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12절에 의하면 공회원들의 마음을 움직여 유리한 판결을 받아 자기들의 의도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의 최종목적은 공회가 신성모독 죄로 스데반을 돌로 치도록 구형을 내리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을 만날 때 악을 이용합니다. 얼마나 비열합니까? 이런 행동은 스스로 자신들이 패배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죄없는 사람을 죽였던 것입니다. 성도의 순교는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감당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도 세상에서 사람들과 정당히 경쟁하고 싸워 이기지 못하면 패배를 인정하는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 바랍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시기하는 마음도, 질투하는 마음으로 더 나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패배 한 경우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진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패배를 인정할 때 발전이 있는 것이고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을 나타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은 성도를 순교의 자리로 이끌며 하나님이 최종 심판자임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수 많은 순교자들이 담대했던 것이고 두려움 가운데에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7:54절 이후는 스데반이 거짓 증인들의 말로 인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합니다.  이를 갈며 죽일 듯한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스데반이 진것이 확실합니다. 스데반의 패배일가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낙담하여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55절을 보면 스데반은 오히려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늘은 세상이 우리를 코너로 몰고 갈 때 성도가 바라보아야 할 곳입니다. 세상이 승리했다고 소리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승리했다는 이 믿음을 갖기 위해 하늘을 바라본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요즘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태어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는 주장에 모두가 밀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한 최근 과학전문지 뉴애틀란티스에 논문이 기재 되었습니다. 전혀 그들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다는 존스홉킨스의 저명한 두 학자(로렌스 메이어, 폴 맥휴)에 의해 반전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과학 분야에서 성적 지향성과 성 정체성에 관한 200건 이상의 연구들을 분석한 것이라는데 힘이 실립니다. 그리도 두 분이 유명한 대학에서 연구한 평생의 경험들이 실려 있다는데 주목받고 있습니다

 

성도는 성경이 말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열려(56) 그 모든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선이 악을 이깁니다. 진리가 반드시 세상에서 승리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최종적 승리는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심판주이심을 성도는 확신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쳐다볼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바라볼 때 내가 세상의 패배자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고 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볼 때 자신을 응원하며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시는 주님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이 진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귀를 막고 돌을 들고 스데반을 향해 달려 들었던 것입니다(57).

 

세상이 우리를 죽일 것 같이 달려 들어도 뒤로 물러설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최종 승리를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우리 손을 드실 때 성도가 진리를 붙들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성령은 성도를 순교의 자리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 감추어진 악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57절을 보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하늘의 것을 본 것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모두가 스데반에게 달려드렀습니다. 복음에 대한 거부 입니다. 더 이상 진리가 이 땅에 들려지지 않도록 자신들의 더 큰 소리로 묻어 버리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세상의 소리로 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으로 자신들의 귀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분에 차지 않아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을 던졌습니다(58). 앞으로 성도가 세상에서 당할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행동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이들에게 이런 행동이 일어난 원인은 바로 회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긴 설교를 했을 때 그들은 회개의 자리로 나오지 못합니다.

 

7:54절에 의하면 스데반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찔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찌릅니다. 히브리서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13절 말씀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실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돈을 주고 매수한 사람들의 거짓 증언이 하나님 앞에 들어날 때 회개의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찔림을 당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잃어버린 신앙생활을 하게되며 우리들도 어느 날 복음이 들려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세상 소리가 더 듣기 좋습니다. 그러다 하나님 말씀 듣기를 스스로 거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찔림을 당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를 막을 수 밖에 없습니다. 더욱 마음은 바로와 같이 단단해 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왕은 애굽에 내린 아홉 번의 재앙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돌이키지 않습니다. 좀더 버틸 수 있다는 자만으로 대항했습니다.

 

마지막 열번째 재앙이 왔을 때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악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잃을 때까지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 것이 세상에 숨겨진 악한 사탄의 실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순교는 몸을 죽이는 자들보다 영혼까지 멸하는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게 하십니다. 스데반의 죽음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6:8절에 의하면 많은 이적과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는데 쓰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더 살려 두어야 교회가 더 많이 성장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5:19절에서는 옥에 갇힌 베드로는 천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사도가 아니고 집사라서 그냥 죽이는 것입니까? 하나님도 차별하시는 분이십니까?

 

게다가 직분을 맡은 자로 본다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정말 하나님은 대책없이 사람만 냅다 죽이는 분으로 보여집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다 답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육체적인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진정 그곳에서 구출되기를 원했다면 베드로의 경험을 알고 있는 그로서도 분명 하나님께 천사를 보내 나를 이곳에서 탈출시켜 주옵소서라고 간청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돌에 맞는 육체적 고통을 들어 달라고도 요청하지 않습니다. 59절에 의하면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 지를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이유는 어려움 없는 세상을 살고, 죽을 때 고통없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너머의 영원한 심판을 건너가는 소망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에 죽음의 순간에 정말 구할 것을 구하는 복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10:28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몸을 지옥에서 다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 세상은 이것을 모르기에 죽는 것만 무서워합니다.

 

성도는 죄의 값인 영원한 사망이 얼마나 고통 스러운것인가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죽음이 왔을 때 자신이 죽는 이유를 묻지 않고 오히려 소망을 품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고 주님의 초대에 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죽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두고 죽어 억울하다는 원망보다 자신의 희생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주님의 뜻을 순간에도 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스데반과 같은 순교의 자리에 서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내 자랑이 죽고, 내 고집이 죽을 수는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믿지 않는 청년 사울과 같은 영혼들을 뒤 흔들어 놓을 복음의 도구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