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4): 힘든 시간에도 복음이 전해지게 합니다
행 8:1-13
성령은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힘들고 포기할 수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을 왜 곳곳에 보내는지
말씀을 통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이 구석 구석 사람을
보내는 이유는 힘들고 어려운 시기일지라도 복음전파는 멈추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1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앞 장에서 보았던 스데반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강한 경고에 해당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최초의 핍박은 로마가
아닌 유대인들에 의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7:60절은 당시 유대교가 기독교인을 이해하는 수준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을 위축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였습니다. ‘나도 죽을 수 있겠구나’라는 불안을 조성할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절대로 기독교인이 되지 말것’을 당부하는 부모들도 나왔을 것입니다. 남편은 혹시 아내가 이런 종교에 빠져있지 않나 점검하는 가정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스데반
순교이후 불안해 하던 기독교인들에게 또 하나의 사건이 1절에서 터지게 됨을 봅니다. 이제는 개인이 아니라 전 기독교인에 대한 유대인의 공식적인 박해였습니다. 신성모독
죄로 스데반이 죽었기 때문에 추종세력들 모두를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으로 죽일 수 있는 구실이 마련 되었던 것입니다.
매우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핍박이 일어난 것입니다. 핍박은 그냥 일어나지 않습니다. 늘
긴 시간속에 음모가 있었고 사람들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앞으로 성도가 말세에 당하게 될 핍박도 그냥
단순하게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적그리스도가 나와 피박을 가하는 그런 단순한 것아 아닐 것입니다.
핍박은
긴 영적싸움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창 3:15절에서
말한 것처럼 인류를 구원할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사탄의 계략이 늘 있어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영적 준비가 안 되면 정말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상황에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 뿐입니다.
복음 전파는 주님이 오실 때 멈추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개인은 어떤 위험한 상황이나 장소, 시간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지속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핍박가운데 성도들을 사방으로 흩어 복음은 멈추지 않는다는 강한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루살렘이라는 중심적
지역을 벗어나 힘든 시기에 타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이유는 성도로 하여금 자기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5절에 빌립이 핍박으로 흩어진 곳은 바로 사마리아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로 가게 됩니다. 그가 그곳에 왜 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이유들 중 하나는 당시 제자들의 가지고 있었던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깨뜨리고자 하는 성령의 의도처럼 보여집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유대인들이 무시해 오던 사람들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망한 이후 종교적으로
혼합되고 혼혈이 일어난 자신들의 형제들을 원수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그 곳을 넘어가야만 그 보다 더한 이방 땅으로 복음이 갈 수 있기에 빌립을 보냈다고 봅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택한 백성이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몸에 행한 할례를 통해 더 자신들이
남들과 다름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율법을 받은 백성들로 그들만이 거룩해 질 수 있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백성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나님은 오랫동안 깨뜨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 그분의 뜻임을 밝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무시된 하나님의 뜻을 회복시키는 순종의 영임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우리가 편한 쪽으로 옮아가는 것을 막아내십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역동적으로 전파되자 성령의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하루에도 삼천 명씩, 오천 명씩 그리고
많은 제사장들 까지 개종하였습니다. 모두가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줄 알았을 것입니다.
성도가
칭찬받고 사도들도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다스려 갈 수 있는 comfort zone이 마련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베드로가 변화산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했던 마 17:4절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복음 전하는 것보다 우리가 전한 이 사람들로도 만족하며 예루살렘에 편안히
머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8:1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박해가 나서 사도외에는 모든 사람들을 흩어지게 했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성령 역사의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후
성령은 빌립을 통해 더 먼곳 에디오피아까지 복음을 전하게 사용하십니다(26절).
저희 교회가
올해 가려고 했던 이디오피아 선교현지 사정의 악화로 인해 일단 보류 상태입니다. 이것으로 실망할 것이
아니라 더 기도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새로운 선교지로 우리 교회의 시각을 전환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선교지는 가지 못해도 선교는 멈출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째, 성령이 위험한 시기에도 땅끝까지 사람을 파송하는 이유는 영적으로 악한 영에게 사로 잡힌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입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이적과 기적들 가운데 하나는 귀신들이 쫓겨나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실상입니다.
7절에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이 소리치며 나갔다고 합니다. 개역, 개정과 공동번역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번역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adhere, cling to, to be closely joined
to a person의 뜻이 있기에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 의미는 귀신의 영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악한 영에 의해 지배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예수 믿기 전의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엡2:2에 의하면 “그때에 너희는…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 때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고백하지 못한 상태에 있던 우리를
말합니다.
그 때
우리는 ‘공종 권세잡은 자’가 주인이었기에 그를 따랐다(follow)는 의미입니다. 추종자로 그 길을 걸었다는(walk) 뜻입니다. 공중 권세잡은 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입니다. 즉 영적 존재, 사탄 마귀를 말합니다. ‘내가 언제 사탄의 추종자였으며 그 길을 걸어 갔냐?’고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과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라갔고’(엡2:1),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진노의
자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그들에게 심판이 있고(계20:11, 13) 영원한 사망(계20:14) 가운데 놓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삶은 어떨가요? 어둠과 혼돈 공허가 있는 삶입니다. 빛이 없기에 방향을 잡아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어둠만이 있습니다. 뭔가
대로를 향해 갈 것처럼 보이지만 혼돈만이 앞에 있습니다.
다 이루었음에도
여전히 공허가 느껴지는 분이 이 자리에 계신다면 빛을 만나기 바랍니다. 빛은 우리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만이 여러분을 어둠에서 공허와 혼돈에서 건져내실 분입니다. 자존심
상해 남들 앞에서 할 수 없다면 혼자 계실때 한 번 무릎을 꿇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정 마음을
열고 ‘제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요. 예수님 이제 나에게 오셔서 나의 빛이 되어 주시옵소서’라고 한번 간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라고
시편 34:18은 말씀합니다. 이 고백이 입술에서 나오는
순간 주님은 당신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한 번 가보지 않은 위험한 곳에 복음자를 보내는 이유는 하나님 아닌 것들이 왕 되어 있는 그 땅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리기 위함입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질 때 가장 놀라는 한 사람이 9절에서 언급됩니다.
시몬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마술사였습니다. 마술은 마법으로 영적 힘을 빌어 초자연적 일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신기한 마술을 했는지는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명성을 얻긴 했지만 빌립이 성령으로 행하는 일들은 하지 못한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3절에서 시몬이 빌립이 행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랐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빌립을 통한 성령의 역사들은 7절에 의하면 귀신들이 소리치며 나가며, 중풍병자들이 낫고, 못 걷는 자들이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들이었습니다.
비록 시몬은
마술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놀라게는 했지만 이런 기적들은 일으킬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절이후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이 내려와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18절에는 돈을 들여 권능을 받을 수 있도록 요청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시몬은 사마리에에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9-11절을 보면 시몬은 마술을 행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자신을 큰 사람’이라 칭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의미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양 떠들고 다녔다’는 의미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그를 따르며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빌립에 의해 그의 능력이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있던 그의 명성도
바닥에 떨어집니다. 세상에 하나님 이름으로 앉아 있는 종교, 마술, 무속신앙, 점성술, 민간
토속신앙 등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땅 끝은 성령이 아닌 악한 영이 지배를 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십니까?
옷을 못
입고 불의가 판을 치고 배고파 하는 모습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십자가가 선포되는 곳이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영적세계를 지배했던 혼탁한 영들이 물러남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는 거듭났고 다른 어떤 악한 것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는 영적 파워가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힘들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고 죽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닙니다. 요10:10에 보면 사탄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
성도는 이런 악한 영적인 것들로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존재에 지배당하지 않는 이 땅이 되도록 전도와 선교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