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5): 한 영혼을 이렇게 구원하십니다
행 9:1-18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이 될까 궁금 할 때가 있습니다. 살인마도 사형수로 죽어가지만 주님 영접했다는
소식을 듣곤 합니다. 성령은 한 사람의 구원의 과정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령은 구원의 대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다가가십니다.1절을 보면
사울이라는 한 유대 청년이 있었습니다. 행 23:3절을 보면
그는 지금 터키의 다소라는 곳에서 태어납니다. 부모님은 그를 당시 가장 유명한 유대종교의 권위자인 가말리엘에게서
학문을 배우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명성
높은 유대교의 지도자 밑에서 철저한 유대종교 신봉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런 그가 새롭게 등장한 기독교에
대하여 듣게 되고 당연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율법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에 거부감을 분명히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를 따르는 제자들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유대교 신봉자답게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대제사장에 가서 편지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남녀 노소를 무론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 오려는 일종의 허가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성도들을 옥에 가두며 그들을 죽이는 일에 대해 가부를 묻는 일에서 이미 자신이 찬성을 던진 일이 있음을 행26:10절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루 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에서
번지고 있는 기독교를 몰살시키려는 그의 전략은 일단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고 그곳에서 그들을 신성모독 죄로 죽여도 로마당국으로부터 문제를 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그의 전략은 다메섹을 중요 거점으로 정하고 출발을 하게 됩니다. 당시 다메석은 고대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예루살렘, 다메섹 그리고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기독교가 팔레스타인을 빠져나가는 중간 지역이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유대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이 다메섹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중간지점에서부터 기독교에 밀리기 시작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유대교에 너무 철저해서 복음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한 사람에게 아무도
엄두도 못 낼 때 성령은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성령은 불신자들에게 주님은
반드시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십니다. 3절에 그가
다메섹을 향해 공문을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도중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임함을 경험합니다.
사울에게
나타난 분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주님이 직접 사울을 찾아와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나타나신 모양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십자가 사건 후 부활하신 모습은 인간의
모습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물고기도 먹는 모습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40일을 지상에서 보내 뒤에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후에 처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 9장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빛에 놀란
그의 반응은 4절에서 땅에 엎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실제 빛으로 사울이 만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소리는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우선 사울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분이며 사울이 자신을
박해하고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사울은
놀랍니다. 그 이유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자신이 믿지 못하고 전부 거짓으로 여기려고 했던 예수라는
사건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머리 속에는 지금까지 유대교에서 들었던
예수에 대한 지식이 스쳐 지나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리고 그가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 그런데 스데반이 죽는 현장에서도 스데반은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다는
소리를 하고 죽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나타난 이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라는 것이
확실하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파악하고 있던 기독교의 정체가 모두 사실이 아닌가.’
소리의
주인공에 대한 감이 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의심합니다. 그래서
한번 묻기로 작정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가?”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찮은 인간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사울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을 때 이처럼 철저한 의심에서 출발하셔도 됩니다.
만약 이곳에
아직 주님을 정말로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겠다는 분이 계신다면 먼저 의심하시고 주님을 만나기 원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만나 주실 것을 믿습니다.
셋째, 성령은 불신자들에게 영적
체험도 하게 하지만 체험이 아닌 믿음이 바탕이 된 진정한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5절에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마땅하게 여길 정도로 불신자 청년은 그렇게 주님을 만나는 확실한 체험을 인생 가운데 하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주이시고 하나님 되심을 믿게 되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뒤 땅에서 일어난 뒤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8절). 그래서 옆에 함께 가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보지도 못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굉장한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나이는 청년인데 지금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내가 지금까지 최고의 학문을
가말리엘 밑에서 배웠는데 한 번도 펼쳐보지도 못하겠구나?
무엇보다도
예수를 박해한 사실에 대해 벌을 받는구나! 라는 마음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이런 혼란의 시간이 없이는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영적 세계는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씀이 계시해 주신 것을 믿을 때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메섹에서 이제 복음을
듣고 고백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체험으로 만 만난 주님을 이제 그의 입술로 고백되는 시간입니다. 이 일을 위해 복음을 듣도록 아나니야라는 선지자를 만나도록 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울의
사건을 보면 모든 것이 체험적인 신앙이라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체험과 함께 그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는 모습을 18절에서 봅니다. 그가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을 때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또 다른 체험을 한 번 더 하게 됩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체험 위주의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경험을 통하여 영적 세계를 믿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다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영적체험을 한 사람들을 보면 우리 모두는 부러워합니다. 그리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18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나니아는 풍부한 영적 체험을 가진 사울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아나니아는
그런 그를 그냥 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적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사울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합니다. 여러분 세례는 입으로 주를 자신의 구주이시며 주인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정한 나의 고백을 통해 믿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소명을 주시며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발견됩니다. 행위로 구원에 이르려는 한 열렬한 종교인을 불러 내었습니다.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그릇으로 소명을 부여하게 됩니다.
소명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대한 반응을 하게 합니다. 새로운 주인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아드리게 됩니다. 때로는 전혀 새로운 일을 하게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일해왔던 그 자리에서 가치관이
바뀌는 일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나를 위한 투자였습니다. 내가 선택한
직장은 나의 미래와 꿈의 실현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난 뒤에는 모든
것이 바뀝니다. 내게 허락하신 직장이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가 되고 직장이 주님을 전하는 선교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졸업을 하고 직장을 선택하려는
기준도 지금까지는 연봉과 환경이 우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부터는 나의 잠재력을
가꾸고 발전시키는 목적이 직장을 고르는 기준이 됩니다.
연봉이나
보너스의 수에 민감했던 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을 통해 이웃을 섬기고 세상에 유익을 주는 일을 창출하는
사람이라는 가치관으로 직장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야가 더 넓어지는 것입니다. 너무 좁고 치열한 경쟁과 제한된 범위에서만 머물던 나 자신을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누구 집 자식이라는 것에서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이 어떤 곳이 되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하는 삶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를 다니느냐가 믿음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명함에 박힌 직업과 직장의 위상에서 나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구원받고
소명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경쟁보다는 협력이 나의 직장생활 중심에서
살아납니다. 개인 보다는 공동의 이익이 나의 가치관을 지배하기에 성숙된 삶의 질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직장에서 평온을 찾지 못하고 늘 일에만 메달려 오던 사람이 자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우상으로 좇아 갈 때는 경쟁 관계에서만 나와 타인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누리는
관계들은 경쟁이 아닌 사랑과 이해 속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욕심이 아닌 만족과 누리는 삶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주님 허락하시는 평강이 나를 둘러쌀 때 지금까지 맛 볼 수 없었던 위로와
안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과정들이 예수 만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 복을 타인에게 소개하는 성도님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