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6): 이런 사람도 구원하기 원합니다  

10:1-8, 34-35


 

예수를 믿으면서 생기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를 구원하는 이유입니다. 그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세상에서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의 구원관입니다. 그들에게 너무나 냉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를 받아 들이기가 너무 힘이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는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총독이 거주하고 있던 군사도시인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파견시킨 해외파병 군인 장교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그가 이방인이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기에 그 역시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겠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모두를 당황시키게 됩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점점 그의 경건생활이 구체적으로 나열됩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로마는 지배자였고 고넬료는 군인이긴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자신뿐만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게 만듭니다. 게다가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많은 궁금점을 낳게 만듭니다.

 

이쯤 되면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0:28, 45절은 그를 이방인으로 분명히 소개합니다. 11:3절에서는 고넬료를 무할례자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실한 유대인들만이 행하는 이런 삶을 이방 사람인 그가 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가족 중에 유대인이 있지 않았나 상상해 봅니다. 부모 중 한 사람에게 유대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을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단지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 전달할 뿐입니다.

 

여기서 뭔가를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고넬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도 천국에 가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의 수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당연히 지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대부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아니 이 자리에는 몇 분이나 있을까요?

 

특히 2절을 보면 고넬료는 많은 사람을 구제하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더구나 22절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그저 조금씩 남을 도우며 사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을 돕는 사람도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에 엄청 앞장섭니다. 어쩌면 양으로 보면 교회보다 더 많은 기부를 하는 단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많은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냐는 것입니다.

 

특히 영화에서 간혹 보는 것처럼 세상에서 악역을 담당하는 분들이 거액을 기부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경건한 사람들이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조건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인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이 가난하고 힘들고 헐 벗은 이웃을 돕고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진짜 살필 것은 고넬료와 정확히 같은 수준일지라도 하나님은3절에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청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넬료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심을 갖춘 사람일지라도 복음이,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자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복음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행위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거듭나야 했던 이유입니다. 복음을 듣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10:10) 사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기 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같은 구원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인류에게 제시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복음을 듣고 세계 복음화의 도구로 사용되어 집니다.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로마는 점점 기독교화 되어가기 시작했고 장차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배경이 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35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

 

이 고백은 고넬료와 같은 그런 수준의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허락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를 통해서도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지도록 하신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누구에게 가장 먼저 구원이 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먼저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져야 할 것이라고 동의할 것입니다.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고넬료와 같은 사람에게도 복음이 필요한 이유는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할지라도 그 선함이 하나님이 원하는 완벽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넬료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율법을 완성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구원받을 말씀,’ 진리, 복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11:14절에 천사가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베드로가 복음을 들을 때10:44절을 보면 성령이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내려 오셨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구원을 확증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그 어떤 종교들은 진리가 아닙니다. 고넬료의 경우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 그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온전히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율법을 통한 행위의 온전함은 한 사람이 태어나고 죽을 때 까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온전한 행위로 구원에 이르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도달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와 비교하지도 않아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본다면 나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나보다 더 휼륭하고 인격적으로 사는 분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그런분들에게 순서대로 구원을 허락하셨다면 나는 이미 지옥에 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엉망이고 쓰레기 같기 때문입니다. 남을 생각하지도 않는 이기주의자입니다. 내것만 챙기는 욕심쟁이 입니다. 경건하고는 담 쌓고 삽니다. 기도는 겨우 밥 먹을 때나 잠잘 때 겨우 할 정도입니다.

 

그런 나에게 순서를 따지지 않고 구원을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진정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