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1):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복음
행 10:44-48, 11:1-18
감사의
달 11월을 맞아 오늘은 먼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달
되면서 온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만 임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 가정의 사건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성령은
사도행전에서 계속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장에서는 빌립집사에 의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후 10장에서는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도 들려지게 됩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공통점이 있지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디오피아
왕의 국고를 맡았던 내시는 빌립 집사로부터 비록 예수에 대한 복음을 접하기는 하지만 물 세례만을 받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서는 뭔가 확연히 다른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0:4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족에게 복음을 전했을때 듣는 모든 가족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 예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번도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듣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영적 체험을 경험한 것입니다. 10:46절을 보면 그들의 입에서 방언과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서 더 놀란 것은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성도들이었습니다(10:45).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무할례자라는 나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있었던 것이 이방인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며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작합니다. 이방인들도 동일하게 성령을 경험한다는 사실과(11:15) 성령은 하나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신비한 영적 체험만을 교회에 남기지 않습니다. 엡 4:3-4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온 교회가 성령 안에서 같은 고백을 하는 믿음의 공동체임을 감사하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잡신들과는 달리 교회가 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같은 성령을 섬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면서
사람 사이에 벽이 무너지는 계기가 만들어짐에 감사해야 합니다. 11:1절을 보면 이방인들과 유다에 있는 형제들 사이에 벽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오랜 벽입니다. 그리고 2-3절에는
할례자와 무할례자라는 벽도 존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벽들은 율법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11:1), 즉 복음을 이방인들이 받았을 때 이 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3절에 보면 비방하는 자들은 베드로와 함께한 사람들을 이렇게 비난합니다. 베드로
당신이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그들에게는
비난거리였지만 베드로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그들과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환상에서 ‘부정한 것을 먹으라’는 명령도 당당히 거절합니다(11:8). 그는 주님을 따르던 제자였지만
아직 복음과 율법의 관계가 정리가 안된 상태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살아나신 이후부터 새로운 의가 이 땅에 나타났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됨으로 더 이상 율법을 따를 일이 없어졌던 것입니다. 이 새로운 의가 소개 되지 않았다면 심각한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유대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선교부 만들어서 세상에 선교사들 파송하고 전도가 이웃 이방인들에게 일어났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상상만 해도 정말 끔직한 일입니다. 우리 역시 전부 율법 지키느라고
고생깨나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늘 양심의 가책 느끼고 죽을 때까지 비참한 마음만 가질 것입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없는 능력이 없기에 자신을 바라보며 실망하고
포기했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그렇다고
지킬 수도 있는 능력도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안될 것 마음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얽매지 않는 이방 신들을 찾아갔던 이유입니다. 구약의 역사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해가 이제 어느 정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갖는
쾌락으로 자신의 죄를 벗어나려 했고 내세에 대한 불안을 피하려고 개념조차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율법으로 의에 이르는 ‘도’를 전해 주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 아닌 다른 신께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왜 자신들에게 이렇게 부담을 주는 율법을 주어 살게
하는지 전해준 선교사에게 원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정말 우리들에게 좋은 것임을 알고,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이방인에게 전해진 복음은
내가 죄인임을 보게 하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오늘 이 주제가 가장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값싼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먼저 주님의 보혈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끝나는 싸구려가
아닙니다. 그렇게 쉬었더라면 왜 우리가 이렇게 복음 전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리고 이 땅에 그렇게 아직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습니까?
복음이
받아 들여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를 한번도 세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기에 하나님
앞에 설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구원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내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보게 하는 거울이 되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늘 다가 오셔서 나를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재할 때 우리는 냄새 나고, 더럽고 추한 것으로 가득 찬 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내가
때로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바로 성령이 생명 얻는 회개를 나에게서 시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
가지 구별할 것이 있습니다.
믿지 않았던
과거의 내 삶의 시간에도 누군가다 복음을 들려주는 사람이 없던 때에도, 학교에서 배운 도덕과, 부모님이 들려주었던 윤리와 세상의 가치관들도 내가 잘못됨을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의지적으로 개선하려는 행동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는 부르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가르침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는 하지만, 그 깨달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나를 보게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임을 알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임을 자각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영역은
윤리와 도덕과 세상 가치관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역할이
여기서 부각됩니다. 성령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듣는 그 사람에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복음이 전해질 때 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보게 되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들려준 분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기에 우리가 ‘생명 얻는 회개’를 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 한 번도 나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는 지적 자각부터 일어납니다. 그때 성령은 나의 감정을 흔들어 놓는 역할을 하시게
됩니다.
복음을
듣는 자신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고 죄 가운데 허덕이며 영원한 사망 가운데 놓여 있음을 확인시킵니다.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 주를 바라봅니다. 살려 달라고 외치며 주님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실제로 새롭게 되는 의지적 행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성도의
회개입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회개의 역사는 멈추게 됩니다. 베드로의 설교 그리고 스데반의 설교에서 반복되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찔림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2:37, 7:54). 복음은 좋은 소식이긴
하지만 듣는 분들은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귀를 막고 달려 들어 돌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가
순교를 각오한다면 성령의 역사는 강력히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역사가 보여준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강한 역사는 우리의 결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동료에게, 부모님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왠지 부담스럽고 힘듭니다. 좋은 소식인데
왜 우리는 부담이 먼저 다가올까요?
바로 그것은
인간이 누구인가를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가장 듣기 싫어하고 거부 해오던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죄된 모습을 터치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당신을 위해
예수가 대신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사실은 듣는 내가 죄인임을 시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상은 복음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세상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소음으로 취급합니다. 이제는 공공 장소에서 복음이 더 이상 들려지지 않도록 법적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이제 더 이상 부끄러워하고 뒤로 물러서는 기독교는 설 곳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성도는 배교와 미혹의 영에 끌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내 속에 있다는 증거는 다른 것에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내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경험하게 되고, 내 밖에서 다른 영혼을
살리는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모두가 성령님의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그분의 요청에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코넬한인교회가 복음을 외치는 캠퍼스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 추수감사절에는 전도한 분들과 함께하며 간증이 터져 나오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