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2):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
행 11: 19-24
지금까지
사도행전을 살펴오고 있습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박해로 인해(8:1)
복음이 예루살렘 주변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절에 의하면 스데반 집사의
죽음으로 인해 흩어진 사람들의 방향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흩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을 베니게라고 불렀습니다. 주요 항구 도시들로서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던 지역입니다. 그리고 구브로는 지중해 가운데 섬입니다. 그리고 20절에 언급되는 구레네는 지금 리비아의 수도 근처를 말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지중해를 지나 복음이 북아프리카로 전달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이
전달되고 있는 경로는 당시 유대인이 퍼져 살고 있던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기는 하지만 피할 곳 역시 자신들의 동족들이 사는 곳이 더 안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복음도 동족에게 먼저 전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19절은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한정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어느 곳이나 그리고 누구에게도 전해져야 할 것임을 20절은 암시합니다. 먼저 복음을 들었던 구브로와 구레네 유대인들 중에서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안디옥은 비시디아 안디옥과(13:14) 시리아 안디옥 두 곳인데 여기서 언급하는 곳은 시리아 안디옥으로
지금 터키 남동쪽을 의미합니다. 이방 땅입니다.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입니다. 지금 11장에서는 비록 미약하지만 교회사에서
위대한 일을 이루는 교회로 성장하게 됨을 보게 됩니다.
13장에서는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힘들어 할 때 모교회를 돕기위해 헌금을 모아 돕는 교회로까지 성장하게 됩니다(11:29).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의 베이스 캠퍼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핍박이라는
환경적인 어려움과 두려움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기독교는 정말 좁은 지역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특정인에게만
구원을 허락하는 믿음으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역적 한계라는 국경을 넘었습니다. 죽어가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갖는 생명을 나누는 영광을 맛보았습니다.
첫째로 이방인 땅에 세워진 교회를 보면서 감사해야 할 것은 환경에 눌리지
않고 십자가의 생명을 전달하려는 믿음의 선배들의 사명감에 감사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잠깐 복음이 전달되는 경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지중해 무역의
중심 항구인 시돈과 두로 베니게를 거쳐 지중해 한 가운데 구브로까지 복음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멈춘 것 아니라 더 나아가 아프리카 북쪽인 리비아까지(구레네) 복음이
전달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방향을 본다면 복음은 서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음이 전달되던 복음이 갑자기 20절에서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 동쪽으로 거꾸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시돈과 두로보다 더 위쪽인 조금 올라간 시리아 안디옥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복음이
지중해 한 가운데서 그리고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바로 그리스와 로마로 전달되지 않고 다시 돌아와 터키를 향해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에 용이한 해상 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더 힘든 내륙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성령이 세계를 복음화하는 전략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은
뻗어 나간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힘을 얻어 지속적으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우선적으로 확립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사도행전 10장이
그 보기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이유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고벨료가 복음을 듣고 성령 체험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회는 놀랍니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 되야 함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소극적으로 전파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복음의 방향이 서진하다가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도록 합니다. 20절에 보시면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헬라인이라는 의미는 당시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 전체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유대인이라는 장벽을 너머 더 다양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갔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우리 교회의 비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인들을 넘어 열방
사람들이 와 있는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를 보며 감사할 제목은 자신들의 편한 생각이 아닌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며 묵묵히 이끌리는 헌신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들에 의해 이방 땅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11:20)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바나바를 그곳에 파송합니다(11:22). 4장에서
잠시 언급 되었던 바나바가 갑자기 이곳에서 등장합니다. 사도들도 있을텐데 왜 그를 파송했을까요?
4:36절에 의하면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모국어와 헬라어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헬라어가
중심이 된 이방 교회였기에 예루살렘 교회와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보내져야 했던 것입니다.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이방 땅에 베푼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합니다(11:23). 정말 하나님의 계획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보며 기뻐할 줄 아는 바나바였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가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오늘 날 교회가 주의해야 할 사항입니다. 선교하게 되면 우리 교회 이런 교회 돕고 숫자가 앞서 갑니다. ‘몇
개 교회를 세웠습니다’가 아니라 ‘이것밖에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부터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비록 우리
교회는 작은 교회지만 우리가 선교의 방향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성숙된 신앙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사용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준비하십니다. 복음이
세계를 향해 나아갈 때 그때마다 사용될 사람들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 예비된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복음은 전했지만 사실상 안디옥 교회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게 되는 것은 바나바와 나중 소개될 바울 두 사람입니다. 이들은 그 시대의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여러분을 훈련시키고 적극적으로 선교의 현장으로 내 보낼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곳에서도 어떤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미국에서 자란 한국교회 성도들입니다. 이제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실 것입니다.
주님은 100년의 한인 이민 역사에서 우리들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에 의해서 유학 보내진 것이 아니라 더 큰 하나님의 비전 속에서 이곳에 보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셋째는, 이방
땅에 교회가 세워진 것을 보며 예비된 자들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안디옥에
복음이 전달되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곳은 확실히 이방 땅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사적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심 사역에 준비된 자로 있었던 바나바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8:14절에 의하면
빌립 집사에 의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디옥에도 복음이 전해지자 바나바를 보내게 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모교회가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고
하나되어 가는 전통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빌립에
의해 복음을 전해들은 사마리아 교회에는 예루살렘 모교회가 두 사도를 파송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령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은 사도가 아닌 바나바가 파송 되었고 성령 체험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로 이것이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는 다양성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방언이 터지고 뜨거운 성령의 체험만이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지 말라는
좋은 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바나바는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 소개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뜨거운 체험의 역사가 절제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그는 23절에서 이렇게 권유합니다.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왜 바나바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안디옥
교회는 구레네와 구브로 출신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사람들은 행2장의 오순절 성령 체험을 현장에서 보았거나 나중 그것을 들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눈으로 보이는 성령의 역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바나바는 오히려 그들에게
절제를 권유합니다. 오히려 이 권유를 받아들일 안디옥 교회는 성령을 체험한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큰 무리가 더해지는 역사가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안디옥 교회를 말씀으로 무장시키려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와서 이곳에서 1년이 넘게 가르치게 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방
땅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보며 성령의 다양한 역사가 허락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방언이
터지지 않을지라도 이적과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지라도 오직 말씀되신 주님이 함께 머무는 것이(23절하) 바로 성령의 역사임을 믿으며 굳건히 설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