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3):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
행 11:19-30
추수감사절을
맞아 온 성도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복된 시간될 줄 믿습니다. 오늘은 ‘세상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크리스천’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고 감사할 이유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생겨나는 배경을 보면 어떤 특정 지역과 민족에게 한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19절에서
보면 스데반 집사의 핍박이후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당시 시리아 지역의 안디옥에 교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된 교회였습니다(20절). 유대를 벗어난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교회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 중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크리스천’이라
부르지 않고 ‘메시아닉 쥬’라고 부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가 얻은 이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나중 믿고 따르는 이방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 말할 때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의 부활을 입으로 시인하는 세상 모든 믿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누구나
될 수 있지만 믿음의 고백을 가진 자라는 의미입니다(21절). 그래서
저 밀림에서부터 도심속에 살아가는 어떤 누구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매우 보편적입니다. 이 말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 다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구원은
모두에게 허락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방식인 예수 십자가를 믿는 자만이 얻는 매우 배타적인
것입니다.
‘배타적이다’라는 의미는 ‘유일하다, 그것
밖에 없기에 다른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구원 받는 다른 방법이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만족할만큼 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대신 죽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용어에는 모든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품고 있습니다. 땅끝에서 우상과 죄로 영원히 죽어가던 우리들조차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생각할 때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 한다는데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부모가 누구이지 모른다면 참 답답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란 말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체성을 확실하게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을
뜻합니다.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라 부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소유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나의
나 됨은 내가 아니라, 나를 소유하고 있는 내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정하여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란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원래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에는 ‘메시야’ 또는 ‘구원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말에는 ‘구원자를 따르는
자들’이라는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내가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다른 종교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Buddhist’ 라는 의미는 ‘부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Buddha’라는
의미 자체는 ‘진리를 깨달은 자’를 의미합니다. 그 깨달음의 주체는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Buddhist’의 의미는 ‘진리를 깨달은 자기 자신을 따르는 자’란 뜻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내가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타자에 의한 구원이 아닌, 인간 스스로 구원의 길을 열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매우 매력이 있습니다. 얼마나 인간이 위대해
보입니까? 나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 수 있고, 그곳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경지인 해탈이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생을 투자해야 합니다. 유혹을 주는 세상으로부터 떠나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부모, 형제, 부부, 자식의 인연도 끊으라고 말합니다.
더 큰
문제는 구원의 경지에 도달할 확률이 낮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에 해탈했다고 말하는 분 몇 사람이나
보셨습니까? 그들만 구원에 이릅니다. 너무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시간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인 보통 사람들은 안 된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것에서부터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이란 이름은 누구에게나 은혜가 베풀어지고,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나는 이름임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불려지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하나님의 마음속에 품고 오던 이름이라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가진 부부는 복중에 있는 아이 이름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다 태어나면 실제 이름을 부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기 전에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스라엘’이라
불러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크리스천’이라는 진짜 이름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이름이
쉽게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성경 전체의 역사를 살펴볼 때 하나님 아버지의 고민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얼마나 그 이름을 부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구약의 창 17:5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고쳐 부르기 원하셨습니다. ‘단지 한 민족의 큰 아버지’에서
‘열국의 아비’로 이름을 바꾸셨습니다. 그 이유는 지으신 모든 사람들을 주의 자녀로 삼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들은 그들만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갖기 고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하나님은 품고 있었던 새로운 하나님 백성에 대한 이름에 대한 계획을 이사야 62:2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주님 오시기 전 700년 전 선지자입니다.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중 주어질 이름처럼 들리지만, 주님이 오시고 난 뒤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모든
열방의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인해 완전히 존재 자체가
새롭게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만드신 모습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가장 행복해 질 수 있는 비결입니다. 감사가 이어지는 길입니다. 주님이 주신 이름에 감사할 때 우리도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는 모습처럼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감사가 넘쳐 날 때 섬기는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우리 교회 기혼 가정들 모두가 서로 드러나지 않고 섬기는 시크릿 천사를 갖게 될 것입니다. 성탄 주일에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사랑 받았던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감사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남은 2016년 감사가 넘치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