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7):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하십니다.
행 12:1-3, 21-23
요즘 한국과
미국의 정치적인 상황을 보면서 상당히 혼돈스럽습니다. 오늘은 말씀 가운데 등장하는 한 세상적인 왕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크리스천의
정치적인 삶과 연결해서 간단히 살펴 보고자 합니다.
1절에 예수님 탄생 시 유아들을 살해한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1세가 소개됩니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당대 헤롯 일가는 유대를 통치하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뿌리가 에돔인이라는 것이 늘 약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불만과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헤롯
왕에게 있어 크리스천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크리스천들은 정치적인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선동적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늘 평화를 원하였고 그들은 국가에 대한 조세 의무도
잘 지키는 성실한 백성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와 이방 땅인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유대교 종교인들이 불편해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을 미리 파악한 헤롯은 불만을 달래기 위한 조치로 예루살렘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타켓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원지에 대한 타격을 주면 주춤하게 될 것이라는 정치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의 죽음보다 좀 더 강도 있는 박해가 예루살렘 교회에 시작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롯이 유대인의 불편한 심기를 미리 알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정치적인 결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몰려가서 그에게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했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로마로부터 부여
받은 그의 권력을 잘 유지하기 위한 자신의 이기적인 판단에서 출발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이 두려울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이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경외’(fear)라고 부릅니다. 단지 죽이시고 벌 주시는 하나님을 무서워
떠는 행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외’는 인간이 어떤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동기에 관여하는 두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저 사람을 찬성하고
다른 사람을 반대하는 가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나의 이익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말씀을 읽어야 하고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살피기 위해 더 잘 아는 사람들과 나눔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세입니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거친 생각이 다듬어지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틀에 박힌 성경적 결론’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순종하게 됩니다.
헤롯의
경우, 복음이 무엇이며, 왜 이렇게 퍼지고 있는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의 사도라도 불러 예수에 관해 들으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자신의 정치적인 판단도 달라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권력 유지용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지 못한 가장 큰 요인은 사람의 숫자에 의존하여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여론에 너무 민감합니다. 여론은
다시 미디어의 통계조사를 통해 재 등장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수가 맞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어떤 이슈에 대해서 수에 중립을 지켜 나갈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더 가까이 설 수 있습니다. 통계로
잡히는 수는 우리의 솔직한 생각과 마음을 싣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선동가들은 수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수를 만들기 위해 광장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보다는 골방에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기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수에 압도되어 판단이 어려울 때, 수적으로 밀리는 다른 편의 사람들의 생각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넓은 문이 아닙니다. 마 7:13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라는 말씀은 사람들의 수가 많다고, 여론이 쏠리는 쪽으로 따라 가는 위험을 지적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상황이든지 행동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품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말씀이
내 생각의 중심에 자리잡는 훈련을 요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출발에 설 때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될 줄 믿습니다.
드디어 잘못된 판단에서 출발한 헤롯은 야고보를 죽이는 사람으로 2절에서 나타납니다. 이미 스데반
집사를 죽이며 공식적인 박해는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를 해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좀 더 강도 있게
이제는 권력을 이용하여 정치적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 헤롯이
다른 제자들을 두고 야고보를 택했는지 그 이유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공생애에 늘 데리고 다녔던 세 명의 비중 있는 제자 중
하나를 고른 것 같습니다. 당시 나이 어린 요한을 빼고 너무 비중 있는 베드로를 제외하면 답은 나왔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이 주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스데반의 순교를(7:60) 먼저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데반 사건은 너무 성장하는 기독교에 대한 유대주의 사람들의 두려움에서 시작되어 그들 스스로 저지른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공식적인 종교적 탄압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남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공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부여 받은 막강한 사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교리에 어긋나는 사람들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생명을 죽이는
사건이 바로 스데반 집사의 순교였습니다.
한편, 야고보의 순교는 종교적 측면보다는 정치적인 면이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원하는 헤롯 왕을 유대인들은 교묘히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건입니다. 3절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라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당시 로마에 아부하여 할아버지 헤롯 대왕 이후 세 아들에 의해 분리 통치되던 모든 영토를 통합하여
다스리는 왕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왕위를 곤고히 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힘들어 하는 문제를 자신의 정치적인 힘으로 도와준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중요한 것을 하나 봅니다. 세상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위협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미치는 전반적인 삶에 대한 영향력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은 생겨날 정권에 대한 투표에 매우 민감해야 합니다.
그들을
선택할 때 정말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인가를 지혜롭게 판단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도 위정자들의 인간적인 악한 심리가 이천 년 전과 같이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순교는 한 정치가의 이기적인 판단으로 한 사람이 희생되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가는 사건입니다. 야고보의
순교는 앞으로 로마제국이 크리스천들에 대해 핍박 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마련하는 계기가 됩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 로마제국의 안정을 침해하는 매우 위험한 요소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용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주라 부르는 신앙이 로마제국 내에서 커져갈 때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는 약화될 것입니다. 전 제국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라는 죄목을 이용해 성도를 죽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 권력가는 유대인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자신의 왕국을 더 안정적으로 다스림으로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잘못된
권력이 설 때 국가는 극도의 혼란으로 빠져듭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너질 때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싸워야 할 상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엡 6:12)
이런 적그리스도적인
통치자를 만나게 될 때 크리스천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분명히 저항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폭력으로 맞서야 합니까? 그것도 답 중의 하나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로 12:18절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 말씀은
인류의 긴 역사가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만들어 낸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주권은 국민에게로부터 나온다.’ 이 말은 선거라는 시스템을 통해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국가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질서대로 처리할 수 있는 좋은 해결책이 있습니다. 아무리 소리 내고 폭력으로 저항의 뜻을 밝히지만 안 내려 오겠다면 결국 법대로 진행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법이 없고 절대군주가 지배하던 시대에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인간적인 방법에 폭력이 사용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하시고 결정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기다리며 인내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로 13:1(현대인)절에“누구든지 정부 당국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력이 다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권력을 바로잡는 주체인 것 같지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믿고 따라야 합니다. 시대는
비록 다를지라도 그 증거를 보여 주기 위해 23절에서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 먹혀 죽었다’고 기록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주님이 세상 중심에 자리잡을 때 나타납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질서가 흔들릴 때, 시대마다 세우신 질서를 통해 바로 잡게 하셔서 다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