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8): 선교 현장에서 중요한 것을 보게 하십니다
행 13:1-12
사도행전 13은 기독교 역사에서 첫 선교사를 파송 하는 장면입니다. 선교사들이 선교의 현장에 섰을 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천 년이 지난 우리 역시 선교 현장에서 보게 되는 중요한 것을 오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선교현장에 설 때 자신들이 성령님의 보내심 속에 파송 되었음을 발견합니다. 4절에서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교회가 두 사람을 보내지만 그 일의 주체는 성령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수동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성령이
하는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어 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주체가 될 때 선교는 안됩니다. 2절에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안디옥 교회에 명령하는 성령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명령에 즉각 순종합니다. 이 일 후 안디옥 교회가 선교의 베이스 캠퍼로 사용됩니다.
결국 선교를 감당하는 교회가 교회사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선교하는 교회만이
주님 오실 때까지 남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국도 미국도
점점 성도가 줄고 있다는 소리 자주 듣곤 합니다. 반대로 이런 소문은 듣지 못하셨는지요?
교회 역사가이며 선교사로 알려진 데이빗 게리슨이 쓴 “이슬람에 부는 바람”(A
Wind in the House of Islam) 이란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저자는
지금 무슬림 세계에 복음이 들어가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거듭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지금까지 선교사들이
무슬림 세계에 복음을 심는 것이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21세기가 시작할 쯤에 이들을 세상으로 흩고 있습니다. 이들이 가는 유럽의 곳곳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 들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코넬한인교회도 그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척에 정착을 위해 들어오고 있습니다. 목숨 걸고 가서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한 시간
반만 가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무슬림 형제
자매들을 향해 내년 여름부터 유티카에서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준비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선교현장에 설 때 ‘내 가족을 잊고 선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이제 팀을 이루어 첫 선교를 떠나게
됩니다. 떠나기 전에 정말 마음이 설레었을 것입니다. 많은 회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한 가지 고민은 어디로 가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육지로 가야
하나 아니면 바닷길로 가야 하나 결정하기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는 그들에게
성령이 확신을 주었음을 보게 됩니다. 4절에 보면 분명히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그들은 안디옥에서
실루기아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로 향하게 됩니다.
성령은 왜
이들을 구브로로 보내었을까요? 궁금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첫 선교지가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왜 다른 곳도 많은데 하필 그곳에 가도록 했을까요?
구브로는 지중해 가운데 있는 한 섬에 불과합니다. 사도행전을 13장가지 읽어 오면서 구브로라는 섬이 주는 정보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4:36절에 보면 바나바가 레위족 사람이며 구브로 섬에서 태어난 것을 소개합니다. 11:19절에는
유대인들이 조금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바나바 고향이기에 아는 사람들이 조금 있어 선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 그곳으로 보냈을까요? 예수님도 고향에서 배척당했음을 이미 그들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답을 5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교팀이 처음 도착한 곳이 살라미란 곳입니다. 이곳에서 행한 첫 일을 보면 성령이 그들을 보낸 이유를 좀더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라고 기록합니다. 바로 여기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그들이 비록
이방인을 향한 선교여행을 출발하였지만 늘 먼저 자신들의 가족들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지만 자신들의 가족들이 빠진 구원이라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첫 선교사들의 첫
선교지는 그들의 동족이 살고 있는 이방 땅이었고 바로 가족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계속13:14절에도 이들이 도착하는 곳마다 회당을 찾아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계속 됩니다.
바울은 로10:1절에서 ‘자신이 간절히 마음에
원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유대인들이 구원 받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먼 곳에 가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지만 가족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진정한 복(福)은 이 땅에서만 한 가족으로 잘 살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한(一) 가족(口)이 천국이라는 동산(田)에서 하나님을 함께 보는(示) 것입니다. 선교현장은 이 마음을 다시 우리들에게
갖게 하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셋째, 심지어 악연일지라도 성령이 준비하신 사람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첫 선교지 살라미에서 바울 일행은 회당에서 복음 조금 전하는 것과 겨우 두 사람 만나는 것이 사역의 전부입니다. 별 수확이 없습니다. 성령은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수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상 첫 선교사들이 파송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사역에 대한 성령님의 반응입니다. 뭔가 화끈한 것 하나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또 그렇게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은 침묵하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철저히 성령님에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만약 처음부터
역사들이 일어났다면 선교도 하기 전에 교만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들의
의가 드러나는 선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성령은 그렇게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단지 5절에서 마가라는 청년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오면서 첫 사역을 마감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마가는 선교여행을 조금만 하다 13절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초반부터 김 빠지게 하는 역을 합니다. 게다가 2차 선교
때 바울과 바나바를 갈라서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었습니다(15:38). 하지만 우리는 나중 바울의 사역에서
마가가 많은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딤후 4:11절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많은 시간이 흘러서 바울의 동역자로 쓰임을 받지만 성령은 이미
그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또 다른 준비된 만남을 소개합니다.
본문 6절은 그 장소를 총독이 머물던 구브로 섬의 바보라고 새로운 장소를 소개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바울 일행은 선교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마술사를 만날 뿐입니다. 심지어 그는 선교팀의 ‘대적자’로 8절에서 기록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성령님이 미리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와 함께 있는’(7절) 총독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 선교팀과 마술사를 먼저 만나게 했던 것입니다. 그를 만난 후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 있는’ 총독을 만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준비하시는 성령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만남도
성령이 관여한다는 믿음을 갖게 만듭니다. 미국에 오게 하시고 교회를 만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까지 고백했다면 여러분을 보낸
목적을 아시잖습니까?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왜 믿지 못하십니까?
부름에 한번 순종해 보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선교현장은 사탄의 정체를 가장 확실히 볼 수 있고, 가장 강한 공격을 받는 곳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정말 영적 세계가 있는가?
사탄이 존재하는가? 이런 궁금점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이번 단기 선교 현장에 참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영적 체험을 갖는 좋은 계기가 될 줄 믿습니다.
바울 일행이
이제 바보라는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6절). 그곳에서 사탄의 강한
힘을 가진 한 사람 만납니다. ‘바예수’(구원의 아들)라 부르는 ‘엘루마’ 즉 박수, 마술사를 만나게 됩니다. 종합해 보면 자신이 가진 마술적 재능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속이는 거짓 선지자 정도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이비 교주입니다. 총독마저도 그에게 미혹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7절에 총독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무식한 사람이고 모두 포섭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속이는 자’ 사탄의 능력입니다.
더 주목할
것이 8절에 있습니다. 바울 일행을 불러 복음을 듣고자 하는 총독에게 복음이
전달 되지 않도록 심한 방해를 합니다. 이것 또한 사탄의 정체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방해를 받습니다. 교회에 온다고 약속한 그 사람이 갑자기 일
때문에 못 온다는 전화나 메시지를 보냅니다.
심지어는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아픕니다. 복음을 접하려는 사람들을 차단하려는 사탄의 세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직접 대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방법을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9절에 성령 충만한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봅니다. 두려움 없이 다가 서라는 뜻입니다.
놀라는 것은 귀신입니다.
여기서부터
사탄이 제압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 “이르되” 라는 말은 선포하라는 뜻입니다.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삶을 버리고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기를’ 선포해야 합니다. ‘모든 의의 원수이며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사탄의 활동을 멈추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의
손이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11절). 한 사람은 얼마 동안
보지 못하는 징계를 당합니다. 이 땅에서 징계는 얼마 동안이지만 죽음 후에는 영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이 광경을 본 총독은 믿고 구원에 이릅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놀라운 성령의 기적을 간증으로 직접 들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혹시 있다면 지금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는 놀라운 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