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19): 우리의 집중력을 키우십니다 

14:1-18

 


바울 일행은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고 1차 선교 여행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이 팀이 되어 은혜의 말씀을 두루 전하고 다녔습니다(3). 매번 가는 곳마다 환영 받지 못했음을 5절은 이들을 모욕하고 돌로 치려고 달려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선교팀들이 도착하면 모두 두 손 들고 환영할 것 같은 착각은 버려야 합니다. 선교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의 삶과 사고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신앙과 관습들과 부딪치는 사역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역을 가게 되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4).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전하는 자들의 목숨을 취해서라도 새로운 것을 수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선교사들은 때로는 도망치는 일도 생깁니다.

 

겨우 목숨을 구해 도망해 온 곳이 바로 루스드라입니다(6). 이곳에 오기 전에 돌에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어지간하면 사람들은 죽을 고비 넘기면 좋아하던 것 대부분 그만 둡니다. 도박도 오락도 내려 놓습니다. 그런데 이 두 선교사들은 다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7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두 사람을 이 어려운 일을 지속하게 만들었을까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중독성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을 멈추지 않게 한 것은 바로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이 사실 때문에 주님이 오시기 까지 나가서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루스드라 성에서 평범한 한 사람을 봅니다. 당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후천적인 사고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바울의 진정한 관심이 9절에서 노출됩니다. ‘불쌍하다는 연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구원에 집중합니다.

 

바울의 진정한 관심은 어디에서나 복음 전파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을 주목하여 보게 됩니다. 바울이 그 사람에게 끌린 이유는 어려서부터 걸을 수 없는 처지에 동정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사람을 볼 때 도와야 할 것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일에 더 집중하기를 바랍니다.  

 

이 집중이 선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집중 때문에 선교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중독성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기에 지속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에 집중하면 옆에서 떠들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집중하지 못하면 산만합니다. 바울은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졌습니다. 그들이 선교를 떠난 이유가 명확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나 부한 자나 상관이 없습니다. 집중은 소명의식에서 나옵니다. 얼마나 목적에 집중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로 하여금 2천년 동안 선교가 이어올 수 있게 만든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선교지에 갈 때마다 불쌍한 사람도 많이 봅니다. 연민도 듭니다. 그 연민에만 사로 잡혀 그것에만 집중하게 되면 사회 봉사단체들이 하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바울은 걷지 못하는 그의 형편 속에서 더 집중한 것은 바로 그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울은 그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까요? 심령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듣는 모습에서 그것을 발견했다고 9절은 말합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의 태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태도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듣는 자세가 있으면 그에게 구원이 가까이 있음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듣는 사람이 일이 생겨 태도가 엉망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욕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복음을 듣는 일이 생길 때 영접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착각하지 말 것이 있습니다. 자주 만나다 보면 우리가 실수하는 것이 하나 생깁니다.

 

인간적으로 자주 만나면 정도 들고 이야기 거리도 비슷해집니다. 정치상황도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들 이야기는 공통 주제가 됩니다. 그런데 더 친한 관계가 형성되면 진짜 중요한 것에 초점을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전하는 복음이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지나 않을지상대방을 고려하는데 더 집중하게 됩니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은 어떤 다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만 나옵니다. 그래서 성도가 두 번째로 집중해야 할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깊어질 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진짜 집중하기 바랍니다.  

 

이제 사람과 좋은 인연도 갖고 담대히 복음도 들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에 이를 만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기는 순간 바로 바울과 같이 우리에게 즉각적인 반응이 반드시 필요함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바울은 9절에서 구원에 이를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 바로 10절에서 반응합니다.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말합니다. 정말 담대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바울과 같은 능력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매우 부럽습니다. 바울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13장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구레네 섬에서 바예수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손이 그 사람을 당분간 보지 못하게 하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13:11). 개인적으로 이런 체험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바울과 같이 담대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담대한 것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내가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즉각적인 대응은 복음을 들은 분에게 담대히 영접기도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난 사람이 복음을 듣고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마지막 용기가 내게 없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만난 사람에게 이런 말은 자주합니다. ‘교회 한번 오세요, 주일 날 말씀한 번 들어 보세요.’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는 마지막 과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실수를 합니다. 바로 그것은 해야 할 영접기도를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마음을 보이는 사람에게 영접기도를 따라 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믿습니다. 이제부터 저에게 오셔서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나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내 속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성령이 있음을 믿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것이 참 힘듭니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기억조차도 안납니다. 용기 내어 만나고 복음도 전했는데 영접기도는 정말 두렵고 떨리는 순간입니다. 바울이 걷지 못한 자에게 즉각 반응하였듯이 우리도 믿음을 보이는 분들에게 즉각 반응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현장에서 세 번째로 집중할 과제는 영접기도입니다.

 

늘 기적이 있는 곳은 시끄럽습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의 기쁨도 있지만 주위에서 그것을 본 사람들의 놀램으로 더 혼잡스럽습니다. 더구나 그것을 보고자 더 많이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11절에서 무리가 발견됩니다. 이 무리들은 성령의 역사를 보고 소리칩니다. 이런 일을 생전 처음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무리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구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뜨겁게 호응하는 무리들이 주께로 돌아왔음을 성경 어디에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과 하나님을 잘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과는 별개라는 뜻입니다.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집니다.

 

무리들은 기적을 일으킨 두 사람을 신으로 모시려 합니다(13). 바나바는 제우스, 바울은 헤르메스(머큐리) 신이라 불렀습니다. 두 사람이 그 도시에서 전해져 오던 전설의 주인공으로 변해 버린 것입니다(13).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왜곡되어 사람이 경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조금 엉뚱한 생각 했다면 평생 그곳에서 신으로 숭앙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입니다. 사람을 우상화하려는 본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자랑이 늘 우리들에게 뒤 따릅니다. 선교 많이 하는 교회일수록 웹사이트에 선교지 이름 길게 나열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것 밖에 못해 죄송합니다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께 향한 초점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집중하면 늘 비교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못하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나의 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열심을 다하는데라는 은근히 자랑이 교만으로 솟아 오릅니다.

 

사탄은 영광이 사람에게 가도록 유혹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리들 앞에서 자기 옷을 찢었던 이유입니다(14). 자기 의를 찢어 버린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겸손한 자세로 나아간 것입니다. 겸손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게 합니다.

 

겸손은 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가장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게 만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구원주와 죄인, 주인과 종, 아버지와 자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집중 되어야 할 것은 나의 이름이나 자랑할만한 나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초점을 잃어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