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20): 교회 질서를 세워 나갑니다
행 15:1-11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 부릅니다. 성령이 주도 되어 세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을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방해물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교회에 필요한 질서들을 세워가며 복음이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첫째, 성령은 교회가 주님께로
받은 권위를 통해 질서를 세워가게 하십니다. 1절에 ‘어떤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이들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안디옥 교회 형제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이 모습은 예루살렘 교회가 주변 여러 교회들에
대해 신앙생활에 있어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몇 군데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 집사에 의해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진 후 8:14절에 의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 하게 됩니다. 이어서
11:22절에는 이방 땅 안디옥에도 복음이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파송 합니다.
그리고 11:27절에는 안디옥 교회가 성장하고 있을 때도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안디옥 교회에 함께 머무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2절은 한 가지 변화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역적 의미에서 좀 더 확대된 ‘유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11:1절부터 시작했습니다.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지금까지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지던 복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방 땅에서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진 후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새로 생긴 이방 교회들에게 사람들을 파송할 필요성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13:1절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는 선지자와 교사들이 보입니다. 모교회로부터 사람을 필요한 영역은 바로 교육 영역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의 교사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복음이 점점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교회들이 이방 땅에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주님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는 사도들의 권위아래 초대교회가 질서를 점점 세워나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날 이단들이(deceptive cult) 틈만 있으면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영적 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성령은 교회에 영적 권위를 부여하십니다. 성도가 교회
중심의 신앙 생활이 되어야만 이런 혼란스런 영적 전쟁의 시대에 미혹 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성령은 교회가 질서를
세워 나가는 일에 매우 사소한 것에도 민감하게 대응합니다. 본문 1절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실수할 수 있는 것을 하나 발견합니다. 과연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은 누가 보낸 사람들인가? 예루살렘 교회가 직접 보낸 사람들인가?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아마도 ‘유대로부터 온 사람들’이기에
교회는 그냥 그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예루살렘 교회의 전통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 교회가 가지고
있던 질서는 늘 사람들을 교회에 “보냄’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그 단어가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어디로부터 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방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점점 복음이 전해질 때 교회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에 인터넷이나
서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통신체계가 없습니다. 복음을 듣는 것은 전도자들을 통해 직접 듣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믿음을 지켜나가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알려주는 교육의 체계가 생겨나야 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매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만을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믿음의 체계를 만들어 갑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전체의
내용을 알게 하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교리체계를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내용들을 알고 있는 사도들이 점점 나이 들고 박해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주님을 따라다니며 사건의 현장들을 본 증인들입니다. 이들만큼 주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고 확신을
가지고 가르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변질을 막기 위해 사도들은 직접 그들이 현장에 가보거나 아니면 그들로부터 훈련 받은 사람들을 파송하는 질서체계를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유대에서 ‘온’ 사람은 맞지만 사도들이나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란 불특정 다수인으로 전혀 신원이 확인 안 된 사람들을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교회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사소한 가능성에도 성령은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캠퍼스 교회들이 이런 예민한 감각들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왜곡된 복음들이 캠퍼스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령은 복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가며 질서를 세워 나가십니다. 교회가 세워진 후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이 생겨 나기 시작합니다.
먼저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에 참가하게 되자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교회 내에 일곱 사람을 안수하여 세웁니다(6:6).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구제와 봉사의 일을 감당하도록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갑니다. 우리 교회도 앞으로 권사님과
안수 집사님들이 세워지기 소망합니다. 교회와 세상에서 섬겨야 할 많은 영역에서 주님 원하는 사역들을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해 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한편,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이 중심이 되어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들이 늘 상주해 있던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행적을 보고 직접 듣고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말해주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개종한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그곳에서 함께 일년을 거하며 큰 무리들을 가르치게 됩니다(11:26).
교회는 점점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갈 때 교회가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임을 알고 가르치는 교육 제도를 정착시키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 이후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명령으로 두 사람을 세워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제도가 마련되게 됩니다(13:3). 초대교회는
사실 순회 전도자들의 헌신을 통해 확장 되었습니다. 독신으로 때로는 가족들과 함께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아 온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단기선교사들을 보내는 교회에서 수년 내에
장기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초대교회 전도자들은 한 마을에 가면 한 가정을 택하고 그 가정이 온전히 믿는 가정으로 변화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는 전략을 세우게 됩니다. 빌립보의 자주 장사 루디아 가정이 좋은 예입니다(15:15). 그리고 이 가정이 그 지역을 책임지는 복음의 센터가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 순수하게 지속적으로 전수될 수 있고 성도의 사랑의 공동체가 핍박 가운데도 유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가정 교회들의 예배중심의 철저한 신앙생활과 주 안에서 나누는 성도간의 교제였습니다. 우리도 내년에는 청년부와 기혼 목장들이 만나는 연합이 자주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한 학기에 한 번 금요일에 연합 집회를 가지면서 음식도 먹고, 찬양도
함께 하고 말씀도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로 든든히 세워져 나갈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은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교회 질서를 세워가게 만드십니다. 성도들이
믿는 것을 질서 있게 체계를 잡아 둔 것을 ‘교리’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만들어진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고백은 지금까지 개신교의 구원관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복음이 아닌 그들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까지도 지켜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사도행전 15장은 거짓 복음이 교회 초창기부터 생겨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교회의 뿌리를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주장들을 초기부터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처럼 강하게 이 문제를 다루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 내가 고백하는 모든 것은 내가 아는 지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내속에서 증언하는
것입니다(15:8). 이것을 내 지적 능력으로 인식하고 내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기에 진실된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백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령이 교회로 하여금 거짓된 것들과 싸우게 하십니다. 유대에서 온 사람들과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납니다(15:2).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예루살렘 회의를 엽니다. 시간 낭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 교회가 믿게될 공식적인
사도들의 고백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매우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누구도 다시 거론하지 못하도록 선포된 것입니다. 먼저
베드로가 (7, 11), 이어 바나바와 바울이(12),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증거합니다(13).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은혜로 받음을 고백합니다. 최근 한국에는 한 가지 논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변화 되지 않는 현상을 지적하면서 믿음으로 얻은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모습 분명합니다. 그럴지라도 복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로 8:34-39). 십자가 주님 곁의 한 강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한 순간도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성령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증거합니다. 말씀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신앙의 고백으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기초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