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주일: 주님께 드릴 선물
행16:1상, 6-15
성탄절이 되면
가족을 위해 선물을 준비합니다. 선물 고르기가 고민스러워 선물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올해 저희 집은 먼저 한 자리에 모여 자신들이 무엇을 갖기를 원하는지 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대상자를 골라 선물을 비밀로 하기로 했습니다.
20달러 내에서 선물을 사서 Christmas stocking에 넣어 주고 아침에 나누고 왔습니다.
성도님들은 어떤 선물을 받기를 원하는지요? 각자 받기 원하는 선물을 예배 후에 선물교환
시간에 다 얻기 바랍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께 물어 본다면 주님은 과연 어떤 선물을 우리한테 받기 원하실까요?
두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첫 번째로 주님이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내가 원하고 고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름대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선교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것을 막아 성령이 인도하는 곳으로 그들을 데려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바울 일행이 15:33절에서 2차 전도 여행을 안디옥에서 출발합니다. *(지도참조).
안디옥을 떠나
수리아를 지나 길리기아(터키남부)를 지나 갑니다(15:41).
이어서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러(16:1) 주위에 복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16:4).
바울이 2차 여행 때 바나바와는 달리 육로를 택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6절에 의하면 아시아(터키의 소아시아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루스드라에
도착한 바울에게 성령님은 그의 계획과는 달리 아시아에 복음 전하는 것을 ‘못하게’ 합니다. 이때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왼쪽 아래로 가면 아시아 지역임으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른쪽 위쪽 방향인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6절) 거쳐 무시아 앞에(7절) 이르게 됩니다.
어느 정도 아시아 지역을 벗어나 위쪽으로 올라와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시아에서도
바울 일행에게 왼쪽과 오른쪽이라는 선택이 다시 주어집니다.
지도에서 보면
왼쪽은 아시아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오른쪽을 택하여 비두니아로(지금의 흑해) 가고자 애쓰게 됩니다(7절).
그런데 성령께서 다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행은 무시아에서 방향을
돌려 왼쪽 위쪽 방향인 드로아를 선택하게 됩니다(8절).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항구에 이른 것입니다. 왼쪽은 바다입니다. 오른쪽은 앞에서 성령이 막아선 비두니아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선택은 이제 배를 타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도 선택은 남습니다. 안디옥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유럽이라는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야 할지 또 다른 선택에 놓이게 됩니다.
이때 성령은
바울에게 밤에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9절).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와서 자신들을 도우라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자신의 계획을 접고 환상에서 보았던
‘마케도냐로 떠나기로 힘쓰게’ 됩니다(10절). 그리고 몇 곳의 여정을 거쳐 드디어 빌립보에 도착하게 됩니다.
빌립보는 당시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습니다. 성령은 그곳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바울 일행을 그곳으로 데려왔던
것입니다. 주님은 철저히 우리의 계획을 버리기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을 먼저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을 못하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더 ‘애를 쓰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더 강하게 ‘허락하지’ 않습니다(7절). 뭔가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루기
위해 열심을 다하지만 답이 지연되고 뭔가 우리 앞을 막을 때 내것을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그때 성령은 우리가
갈 길을 보여 주십니다.
10절에 바울은 그제서야 성령의 계획을 ‘인정’합니다.
사실 나중에서야 알게 됩니다. 바울 일행이 고집 부려 가려던 7절의 비두니아는 이미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벧전 1:1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라고 언급합니다.
이미 그곳은
베드로가 전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이 경험을 통해 바울은 나중 자신의 선교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로 15:20절에 의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신앙생활이란
내것을 내려 놓는 순종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훈련입니다. 성도는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전달해 주는 성령의 인도를 늘 따라가시시
바랍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인 동시에 주님이 우리에게 정말 받기를 원하는 두 번째의 다른 선물이기도 합니다. 소개하고자 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정말 받고 싶어하는 선물은 우리의 기도를 선물로 받기
원합니다. 12절에 보면
바울 일행이 드디어 주님이 원하는 목적지 빌립보에 이르게 됩니다. 그 성은 11절에 의하면 마케도냐의 첫 성입니다. 가장 큰 성이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으로 들어갈
때 처음 만나게 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빌립보라는
이름은 알렉산드 대왕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성령님의 뜻을 알았기에 열정적으로 바로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일행들이
그냥 이 성에서 수일 동안 유했다고 12절에서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잘
알지 못하는 도시를 살펴보는데 시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앞에서도 소개한 것처럼 빌립보는 새로운 지역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이 활동해 오던 지역과는 전혀 다른 곳에 들어 온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문화와 땅을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시기를 ‘중간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시대에 세계사의 중심인물은 페르시아제국을 무너뜨리고 인도까지 진출하려던 알렉산드 대왕입니다. 그의 사후에 동과 서를 이어주는 헬레니즘 문화가 만들어지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유대민족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아시아 다소에서 태어나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도 지리와 역사 철학 등을 배우며 얼마나 세상이
넓은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체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에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낯선 땅에서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지금 2차 선교 여행 중입니다. 1차 여행은 바나바의 고향과 내륙지역을 돌아 다녔습니다.
그 지역들은 다소 출신인 바울에게 낯선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1차 여행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방 땅에서 지혜롭게 선교전략을 모색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유대인들이 이곳에는 많이 거주하고 있지 않아 복음전파가 용이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앞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에게 핍박이 왔을 때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너무 유대인들의
수가 적었기에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전략을 취할 수가 없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 성에 유대인들이 적다는
것은 13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어는 곳이든지 가면
적당한 수가 모이면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수가 적었기에 ‘기도처’ 라는 것을 대신하게 됩니다.
이 기도처는
대부분 도시의 외곽이나 강가에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것에 방해 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았습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 일행이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갔다는 구절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 일행이
전혀 낯 설은 땅에서 선교 전략을 찾지 못하여 헤매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만났다는 뜻입니다.
복음 들고 가면 모든 것이 잘 풀릴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동행해서1차 여행 때는 기적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성령이 ‘가라’고 해서 왔지만 뭔가 잘못 되었다고 판단하려는 순간입니다. 성령도 틀릴 수 있구나 스스로 결론 지으려 합니다. ‘역시 내 생각대로 가야 하는데 괜히 헛것
보았구나’ 라고 투덜거리려는 찰라입니다. 이 때 선교일행은 기도하는
장소를 찾게 됩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는 무릎을
꿇으려 갑니다. 아무것도 안 보일 때 하나님의 싸인을 확인하는 순간이 기도입니다. 성령을 무시하려는 유혹이 올 때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해야 주의 일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이 준비한 답을 얻기 시작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은 예비하신 사람, 루디아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뭔가는 하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도착하고 난 뒤 당연히 기도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은
며칠 동안(12절) 없었던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는 분량이
차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은 그냥 그 도시에 수일 동안 시간 죽인 것 아닙니다.
도착해서부터 기도했지만(12절) 기도처를 찾은
것은(13절) 더 집중해서 답이 올 때까지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기도는 노동입니다. 일을 하면 일한만큼 임금을 받습니다. 최소한 한 시간이라는 단위가 충족 되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도 최소의 시간 기준에 미달될 때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제 2016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가 기울기 전 남은 시간을 가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민족과 국가를 위해, 세계를 위해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선물로 드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