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3): 직접 싸우지 않습니다
시편 35: 1-24
인생을
살다 보면 경쟁상대와 싸움을 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싸우는 사람이 싸울 의지와 계획 등의 준비가
되어 있으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싸움이 있습니다.
먼저, 그런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3,4절에 의하면
‘나의 목숨을 노리고 나를 해치려고 추격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너무 비겁합니다. 왜냐하면 7절에 의하면 까닭 없이 나를 잡기 위해 몰래 그물을 쳐 놓습니다. 이유
없이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 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과
싸워 이길 수가 있을까요?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7, 19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가르쳐주듯이 ‘이유 없이’ 또는 ‘까닭 없이’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의 실수를 이용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적이
인식되면 방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죽이려는 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공격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내 앞에서는 웃습니다. 그런 사람은 전혀
나를 해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사람으로부터 당하고 나면 나중 알게 됩니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치는 그물과 파는 웅덩이는 눈에 보이지 않게 준비합니다. 사냥을 할 때 덫을 보이게 하는 사냥꾼이
누가 있습니까?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그물과 웅덩이를 뭔가로 덮어 둡니다. 위장을 합니다. 숨은 웅덩이에 빠지거나 그물에 잡혀야 그때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매 순간 ‘그물과 웅덩이가 내 앞에 있을 거야’ 라고 의심하며
살아야 합니까? ‘저 사람은 나를 잡으려는 사람이야’ 라고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합니까? 그리고 누가 이런 사람과 친구하려고 하겠습니까? 또 이런 사람은 한 발짝도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사탄이 바로 노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해서 더욱 소극적이 되게
합니다. 상대를 자꾸 불신하게 만들어 공동체의 협력이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서서히 말라 죽게 만드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이제 그 현실을
알았다면 대항할 준비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준비는 의의로 특별한 것이 없이 너무나 평범해야 한다는 것을
두 번째로 나누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의 전략은 알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그대로 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20절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쉬운성경은 “조용히 지내는 착한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평소 삶이 12절 이후에서 소개됩니다. 상대가 어떤 마음을 품은 사람이든지 늘
친절하고 선하게 대합니다.
주위에
아프다는 소문이 들리면 13절에서처럼 찾아갑니다. 그를 위해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베옷을 입을 수는 없지만 구약의 이런 행위는
아픔을 당한 분들과 함께 그 아픔을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을 때(13하) 함께
슬퍼하며 함께 울어주는 위로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14절). 아픔을 당해 고난과 시련 속에 있을 때 따뜻한 말로 격려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20절 상). 이것이 의인의 삶입니다. 성도의 모습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행동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성도를 볼 때 악의를 품은 자들은 좌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발톱을 숨기고 상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16절에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책략에 넘어질
것이라고 비웃거리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리고 잘 안 넘어질 때는 이를 갈며 저주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늘 자신에게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은
비겁하게 뒤에서 칼을 갈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서슴없이 자신에게로 다가옵니다. 자신이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난처한 일에도 동참해 줍니다. 이때 그들의 악한 계획은 무너지지 시작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뒤에서 칼을 준비하는 사람은 자기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사람을 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가장 놀라는 것은 자신의 계획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22절에 “여호와여 주님께서 다 보셨다”고 합니다(쉬). 모든
영어 번역은 완료형으로 이미 주님이 보고 알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볼 수 없는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꽤 뚫어 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해오던 의인의 길을 그저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싸움에 뛰어 들지 않아도 직접 도우시는 하나님을 보고자
합니다. 내가 직접
상대방과 싸우지 않으면 누가 대신 싸워 줍니까? 싸움에 우리를 보내지 않으시고 친히 그 먼지와 수치와
낭패를 덮어쓰고 싸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먼저 다툴
것과 싸울 것을 구별하여 대응하십니다(1절). 우리는 칼과
화살이 뚫리는 갑옷을 입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입고 손에 드는 갑옷과 방패는(2절) 그 모든 것을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완벽하게 방어 무기로 무장한 주님이 방어하는 모습을 23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주님이 떨치고 일어나십니다. 나를 직접 변호해 주십니다. 나를
위해 답변을 준비하십니다’(23절). 우리가 하는 자기 변호는
변명이 될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또 다른 비난의 꼬투리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소모전으로 지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이 직접 준비한 변호는 다릅니다.
그 뛰어나신
지혜로 모든 것을 처리해 주십니다. 24절의 하나님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올바른 법에 따라 옳고 그름을 가려 냅니다. 그래서
그 어느 누구도 비웃을 수 없게 만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바라고 믿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지금까지는
방어하시는 하나님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3절에는 이제 직접
공격 무기를 준비하시고 적을 제압하는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은 자신들이 가진
무기들로 유명합니다. 특히 관우의 청룡언월도와 장비의 장팔사모, 유비의
쌍고검 그리고 조조의 의천검 등이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유명하긴 하지만 하나의 무기만을 잘 사용하는 장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칼과 창을
모두 사용하십니다(3절). 이보다 더 유능한 장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류가 이 땅에 존재하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이긴 피조물이 없습니다. 모두가 패배했음을 죽음으로 증명하였습니다.
게다가
수 많은 천사들을 거느리십니다. 수 많은 군대를 거느리신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무능한 장수라서 군대만 많이
거느린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천사들을 거느리신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돌보시기 위함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보호자이시고, 우리를 대신해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위해 싸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9절을 보면
여호와 안에서 즐거워하고 삶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기뻐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잔치하는 것입니다. 늘 승리 뒤에는 잔치가 따릅니다. 사람들이 초대됩니다. 풍성한 이 잔치는 바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매일 승리자이기에 매 순간마다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10절에는 시편 기자인 다윗은 온 몸으로 외친다고
합니다. 예배는 온몸으로 외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내
손과 발 모든 것이 승리를 축하하고 기뻐하는데 사용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 손을 들고 하는 것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승리자는 조용하지 않습니다. 얌전 빼지
않습니다. 승리자만이 구원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전쟁에서
살았는데 기쁜 것이 제대로 된 승리자인 것입니다.
올해 새해에는
찬양도 사망에서 이긴 승리의 감격 때문에 그리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격하며 온 몸이 외치는 찬양 되기 소망합니다. 예배는 우리를 위해 이루신 십자가 승리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탄 마귀의 머리를 짓 누르시고 승리하신 것을 노래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즐거움이 표출 되어야 합니다. 세상도 나름대로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술과 흥이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가 빠져 있기에 여호와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문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가 일회성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구’입니다. 적들이 자꾸
생기면 일회적으로 승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전략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런 적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자에게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나를 치려 하는 자들을 초토화 시켜버립니다. 사실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지만 기도의 응답은
땅을 향해 내려 꽂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25-28절). 기도는
걸프전에서 B-52폭격기의 융단 포격과 같이 우리 속의 시기, 질투, 거짓말, 욕심, 정욕
모든 것들을 싹 쓸어버립니다. 그리고 우리 내면 속 지하 벙커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습성까지도 파고
들어가 박살내 버립니다. 2017년도에는 이 기도의 무기를 잘 활용하여 대승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