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5): 주를 바라는 자입니다
시편 33:16-22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한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꿈꿉니다. 건강을 잃어 버린 사람은 건강을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란다’는 뜻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소망한다(hope)’는 뜻입니다. 성도는 주를 바라는 사람들인데 왜 주만 소망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주님이 인생 최고의 위기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16-17절에서
다윗은 전쟁에서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전쟁을
언급하지만 사실은 고대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 가운데 가장 위협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개인의 생명에 대한 위협을 떠나 한 민족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인생 최대 위기에 대해 특별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17절입니다. 무기와 군사가 많은 것과 구원과는
별개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은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 4차에 걸친 아랍연합들과의 전쟁에서도 증명이 되었습니다.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이 단지 6일 동안 자신들의 영토보다 3배나
더 큰 땅을 차지하는 대승을 경험합니다. 많은 공군력을 가지고 있던 이집트는 단지 3시간 만에 공군력의 80%를 잃어버립니다.
4일만에
주변의 시나이 반도, 요르단 서안, 시라아 골란 고원을 장악해
버립니다. 물론 미국의 지원이나 훌륭한 지휘관의 작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 최고의 위기에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믿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최고의
위협이 올 때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제직을
맡으신 분들이나 모든 성도들도 ‘내 인생 최고의 문제를 책임지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를 뒷배를 가졌느냐를
중요시합니다. 인생보다 더 든든하고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 최고의 위협을 담당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최고 위기가 무엇입니까? 살다 만나는 인생 최고의 위기가 우리 앞에 수 없이 많습니다. 학위, 미래, 직장, 물질, 건강, 관계, 자녀 문제, 부부 문제. 무엇이든지
있게 마련입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위기의
순간에 구원자가 되어 주십니다(아멘).
둘째로, 주님은 평범한 삶에서
일어나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는
인생의 최고의 위기를 다루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평범한 삶에서 일어나는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18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살펴 주신다’의 의미는 눈이 지켜 본다(공동, 새) 또는 주님의
눈이 사람들 위에 있다(the eye of the Lord is on someone who)는 의미입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경외’는
‘fear’라는 의미로 ‘어떤 대상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 나오는 구절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두려움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두려움 가운데 있지만 주님이 용서하실
것이라는 믿음 안에서 용서의 자비를 (헤세드)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경외’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죄 문제는 늘 피로 해결 되었습니다. 동물의 피가 우리의 죽음을 대신해준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도 늘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범하는 죄들이 있었습니다. 알고
짓는 고범죄가 있었습니다. 습관에 따라 짓는 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후에 늘 주님의 진노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동물의 피를 통해 죄 용서함을 받는 제사가 늘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제사의식이 제도화 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죄가 늘 일상화 되어 있다는 말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 늘 죄를 지을
수박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용서함 받는 동물의 희생 제사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은혜는 끊임없는 동물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되신 우리 주님이
흘리신 보혈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십자가 은혜인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나야 합니다.
주의 보혈이
있기에 회개를 통해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이 은혜는 비싼 동물을 죽이는 비용을 덜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죽여 피 흘리는 고된 일이 생략되어 편리를 제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더
완전하고 근본적인 죄 문제의 해결인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우리를 날마다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서 더 큰 은혜를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은 우리의 죽음
이후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면
우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진다고 말씀합니다. 이제는 살아있는 동안 일상의 죄와 살다가 만나는 인생 위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인간의 최대 난제인 죽음 너머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예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죽음까지 가는 시간상의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죽어보아야 알 수 있다는 배짱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를
준비한 사람은 모든 것을 준비한 사람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심판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도 없는 시간에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해진
섭리입니다. 그래서 6-9절까지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모습을
소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면서 특히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으로”라는 6,
9절의 반복되는 표현입니다. 말씀은 말하는 분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창조주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구약이 비록 신약보다 적은
내용을 다루지만 죽음 이후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 기자 다윗은 이 문제를 분명히 다룹니다.
사망은
죽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이 땅에서 맞는 마지막 순간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망은 죽음 이후에 있는 마지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고(19절상)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영혼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사울이
악한 영에 시달릴 때도 그가 비파를 타는 실력이 뛰어나 악령을 물리친 것이 아닙니다(삼상 16:23).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 더 영의 세계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삼상 16:13절에 의하면 구약시대에 어떤 특정인들에게만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면서 그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의 소유주, 주인 되십니다. 그러므로 20절에서
다윗이 고백하듯 우리 영혼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소망할 때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영원히 살 수 있음을 믿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기 때문에 주를 소망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1절을 보면 주를 바라볼 때 우리 마음이 즐거워하였다고 말합니다.
마음(레브)은heart, understanding, mind, knowledge, wisdom로 번역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정신 세계를 말합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스트레스를 받는 우리의 마음, 정신, 또는 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성호를 의지할 때 이 고통으로 벗어 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정신적 고통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주를 소망할
때 그분의 성호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호’가 무슨 뜻입니까?
번역들은
이름, 거룩한 이름으로, 또는 holy name으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인간에게 알리신
것은 모세였습니다(출 3:14).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스스로 있는 자는 누구에 의해서도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닙니다. 어떤 피조물도 생기기 전에 이미 존재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분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합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은 결국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가장 우리를 잘 아시는 분입니다. 어느 날 포드라는
사람이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차가 발명되고 부자들만이 소유하던 시절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차를 길에 세우고 있었습니다.
즉각 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에게로 다가 갑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차에 문제가 생겼다고 알려줍니다. 포드는 그에게 자신이 한번 그 차를 볼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차 주인은 당신 같은 사람이 어찌 차를 아느냐는 그런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 스토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주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우리를 잘아는 분은 없기에 그분의 이름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YHWH)이십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히브리어 단어들은 Y(요드): 손, H(헤이): 본다, W(바브): 못, H(헤이): 본다라는 의미입니다.
‘보라 손을, 보라 박힌 못을’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에서 못에 박힌 주님의 손에서 흐르는 보혈 때문에 우리가 모든 질병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사53:5절은 선포합니다. 모든 죄와 허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적 고통까지도 치유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모든 치유함의 복을 누리고 자유함을 맛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