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10): 인생 최대의 문제는 기적으로 풀라  
왕하 4:1-7


인생 살다 보면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형편에 놓인 한 사람을 봅니다. 1절에 선지자 생도의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옵니다. 그녀의 ‘부르짖는’ 모습으로 보아 인생 최대의 문제에 부딪힌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에게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었고 선지자 엘리사가 인정해 줄 정도의 신앙을 소유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죽게 됩니다. 게다가 가족도 모르는 채주가 와서 당장 빚을 갚지 않으면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두 아들 전부가 종이 되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빚을 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난감한 사정입니다. 

그래서 그녀로부터 나오는 소리는 전부 ‘없다’에 집중됩니다. 죽었다: 문제를 해결할 남편이 없다. 아이를 데려간다: 갚을 돈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의 최대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힘든 환경에도 믿음의 언어를 사용하여 사고의 전환을 시도해야 합니다. 온통 없다고만 보는 그녀의 시각을 선지자는 2절에서 변화를 시도합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는 말로 대응합니다. 그녀로서는 깜작 놀랄 일입니다. 자신에게 한 사람도 도울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게다가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뭔가 있구나’라는 반대의 소리가 들립니다. ‘없다’에서 ‘있다’로, ‘안 된다’ 에서 ‘된다’로 소망을 주는 말들입니다. 

믿음의 말 한 마디가 좌절과 포기에서 가능성을 바라보게 합니다. 희망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절박한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힘든 분들이 와서 절박한 요청을 할 때 그들에게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돈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런 형편이 못됩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그도 남의 도움을 받고 살아갈 정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4:8). 있다면 주었을 것이고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엘리사와 함께 사는 생도들도 조금씩 돈을 모아 도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왕기 전체를 보면 당시 선지자 생도들도 흉년으로 인해 서로 모여 공동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4:38-39에 보면 이들도 먹을 것 조차 없어 들에 나는 열매로 연명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누구도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힘든 상황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기하고 낙망 가운데 있는 그들의 사고를 전환시킬 수 있는 믿음의 말 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평소에 읽고 암송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나누시면 됩니다(빌 4:13).

둘째, 희망의 소리가 들려오지만 내 속에서 일어나는 더 큰 불신의 소리를 죽이는 작업을 반드시 하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으로서는 엘리사가 뭔가 자신에게 생각의 전환을 주어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선지자의 말에 불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2-3절에서 밖으로 나가라고 하지만 나간다고 죽은 남편이 무덤에서 일어나 돌아옵니까? 빈 그릇을 빌린다고 당장 그 소식 듣고 채주가 빚을 탕감이라도 해 준다는 약속도 없습니다. 게다가 선지자는 빈 그릇을 조금 말고 모든 이웃으로부터 빌리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지금 엘리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자신에게 조그만 희망을 유도해서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청난 부담감으로 다가옵니다. 죽은 남편이 돈을 빌려 지금 이 형편이 되었는데 자신마저 더 뭔가를 이웃으로 빌린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이웃들이 빌려나 주겠느냐는 의심이 듭니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 빌려 주었다가 받지도 못할 텐데 빈 그릇인들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엘리사를 통하여 전달 된 하나님의 말씀은 그녀로 하여금 속에서 불신들을 제거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히 4:12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동력이 있기에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녀 내면의 소리입니다:

빌리는 것은 같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빌린다고 하지만 남편처럼 빚을 더 이상 지지 않을 것이다. 돈을 빌리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릇들은 사용하고 난 뒤 그냥 돌려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이웃 사람 모두에게 돈을 빌린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돈을 빌렸지 않는가! 그러므로 자신이 나가 이웃들에게 빈 그릇들을 빌린다고 안 빌려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너무 힘들어 하는 자신에게 그들에게는 손해도 안 되는 그릇 정도는 빌려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가게 됩니다. 

말씀을 품을 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동하기 전에 먼저 내 속에서 불신이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말씀을 곱 씹는 묵상을 반드시 가지시기 부탁 드립니다. 이 시간이 있어야 내 속의 불신이 0.1%라도 제거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셋째, 불신을 내 속에서 조금이라도 죽인 사람에게 바로 이어갈 것은 순종의 불씨를 일으켜야 합니다. 불신이 조금이라도 사라지면 다음은 순종의 결단이 내 속에서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엘리사는 희미한 가능성을 아직 생각으로만 갖고 침울하게 앉아만 있는 여인에게 밖으로 나가 그릇을 빌리라고 말합니다. 행동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행동 이전에 먼저 마음의 결단을 일으키기 위한 단계입니다. 마음의 결정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내면 속에서 뭔가를 이해하는 단계이며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태도와 시간을 말합니다. 이것을 순종이라 부릅니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인간은 자신의 사고 속에 수용하는 단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순종은 행동으로 나아가기 직전의 긍정적인 마음의 수용 자세입니다. 순종은 때로는 행동과 함께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 상으로 보면 행동이 있기 직전에 마음의 결정이 있고 난 뒤 움직임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다가올 때 그냥 그대로 믿고 따라도 손해 가지 않는다는 단순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 여인은 엘리사가 뭘 시키려고 하는지 의심도 갑니다. 하지만 일단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따르겠다는 마음의 결단인 순종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 속에서 0.1%의 불신을 사라지게 하는 순간 마음으로 결단하는 순종이 일어나기를 도전 드립니다. 순종은 내 속에서 불신이 조금이라도 사라질 때 바로 시작해야 합니다. 0.1%의 불신이 사라지는 그 공간에 믿음이 생기면 그것을 큰 믿음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마음과 생각에 머문 순종을 밖으로 끄집어 내어 실행하는 단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각이 아니라 행동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손해 보게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시면 두 아들과 함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빌려온 그릇에 기름을 붓는 행동이 일어남을 보여줍니다. 행함이 없는 이유는 사실 순종의 단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순종은 모든 것이 이해 가지 않는 것들이 앞으로 더 생길지라도 끝까지 간다는 마음의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로 전환하는 과정에도 처음 단계에서 가졌던 불신을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앞에서 불신을 제거하는 작업은 0.1%의 긍정적인 불씨를 만들기 위함이라면 이제 마지막으로 하는 작업은 0.1%의 남은 쓰레기들을 싹 제거해 버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온전함 믿음이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우리가 제거해야 할 남은 쓰레기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은 우리의 정욕을 위해 하나님 이름으로 간구한 것입니다. 포장된 기도입니다. 선물은 포장하면 아름답지만 기도는 우리의 속이 진실로 보여야 합니다. 애통하는 마음 그대로가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한 가지 풀리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왜 엘리사는 문을 닫고 빈 그릇에 기름을 부으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그릇들을 더 많이 빌려 왔더라면 평생 부자로 살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순종의 마음으로 믿음을 갖고 행하는 일에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욕심마저 충족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인에게 일어난 기적은 빚을 갚고 두 아들이 생활하는 것에만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빚을 갚는 것은 당장 급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생활하도록 하는 것은 이 아이들이 지금은 어리지만 자라서 자신들이 생활 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우리에게 잉여물을 더 주어서 편하게 살도록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여인이 더 많은 그릇을 가져 오는 욕심을 내었다고 해도 그 욕심은 채워지지 않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빌리는 한계를 가지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이 빌린다고 할지라도 그 방을 채울 만큼만 빌려 왔을 것입니다. 반드시 문을 잠그고 하라는 말은 더 많이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욕심으로 기회를 잡는 일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빌려온다 해도 이웃들이 가지고 그릇들의 한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마저 아시고 그들에게 적합한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릇을 채우는 일을 하는 아들이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가장 최대의 양이 주어진 것이고 가장 적절한 것입니다. 

이점이 성도들의 가장 마지막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숨겨진 우리의 욕심. ‘하나님 영광을 위해 주십시오’ 라고 부르짖는 포장된 나의 정욕들이 하나님 눈에는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제거 되지 않는 불완전한 믿음은 인생 최대의 난관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신 말씀들을 한번 깊이 묵상 해 보시고 철저히 따라가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에게는 2개의 비밀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는 다음 주에 나누게 될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믿는 사람들이 직접 울부짖어 간구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입니다. 

성도는 이 비밀 무기가 있다는 것과 그것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체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생각 속에 머무는 긍정적인 사고들을 순종으로 수용하고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은 우리의 가장 작은 믿음이(0.1%) 일으키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입니다. 우리가 다 이루어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인생 최대의 문제를 기적으로 해결하는 체험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