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세계관(11): 너무 늦고 포기한 자리에 은혜가 흐릅니다 

왕하 4:8-17


 

성도에게는 두 가지 비밀 무기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우리의 간절한 간구가 있을 때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하심인 기적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기적과는 다른 은혜라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지 본문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은혜는 인간의 이해 차원을 넘어선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꼭 주시려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그 은혜의 기준이 무언인가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을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하듯 은혜 주심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도 지난 주와 같이 여인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앞 본문에는 매우 갑작스런 사건이 발생하고 어쩔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만난 한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삶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평범한 가정입니다. 남편도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며 상당한 재산도 있습니다. 남들은 가뭄과 흉년으로 어려운데, 이들은 오히려 남을 도울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가정으로 소개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베푸는 자로 나타납니다.

 

또 다른 차이점은 간절히 도와 달라는 울부짖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선지자가 그들을 도우려 할 때 거절하는 모습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지만 불신하는 듯한 모습도 언뜻 비춥니다(16).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이 가정에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주십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은 지난주와 같이 기적적인 요소가 분명 있긴 합니다. 나이든 부부가 자녀를 가진 것은 기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만 이 두 사람에 믿음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뭔가를 주려고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기적이라고 부르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로 성실히 살다 보면 하나님이 알아서 챙겨주시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밖에 없는 선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성도의 비밀무기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지는 당사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정말 기대하기 힘든 일을 시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이 살던 상황을 다시 한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엘리야에 이어 엘리사가 여호와 신앙의 맥을 이어가는 시대였습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와 다르게 사람들을 길러내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몇 곳에 선지자 생도를 양성하는 거처를 만들고 순회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여호와 신앙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선지자 생도들은 집단생활을 영위하며 어려운 시기를 넘겨가고 있었습니다.  

 

모여 사는 선지자 생도들도 힘든 공동체 생활이지만 엘리사 역시 거처 할 곳 조차 없었습니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사역을 하는 모습이 어느 한 여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 여인은 선지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합니다. 사실 이 여인이 이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참 힘든 결정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위험이 따를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전개되는 북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상황이 박해의 수준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과 선지자 사이에 강한 긴장관계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엘리야 시대에는 여호와를 섬기는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났음을 이미 왕상 18:4, 13장에서 소개 되었습니다.

 

물론 엘리야의 부흥운동으로 여호와 신앙이 다시 회복되는 시간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합의 아내 이세벨의 죽음은 시간상으로 훨씬 나중에 일어나기 때문에(왕하 9:30) 위험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왕이 싫어하는 선지자를 대우하고 섬기는 태도는 가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은혜는 위험 가운데도 그 위험을 감수하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 땅에서의 복처럼 여겨집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의 신앙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복을 받기 위한 의도로 이런 일을 시작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뜻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섬김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에게 주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섬김이 점점 깊어지는 사람들에게 임함을 볼 수 있습니다. 여인의 섬김을 세밀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선지자의 식사 대접으로 시작됩니다(8). 그러나 점차 시간이 가면서 남편까지 설득하게 됩니다(9). 다음에는 자신의 집에 선지자를 머물도록 거처를 마련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섬김의 자리로 더 이어지게 됩니다(10). 이 여인은 선지자와 만남을 이어가면서 그를 돕기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에도 그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먼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는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처음부터 거창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소문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섬김을 찾아 내었던 것입니다. 그저 선지자가 순회하며 자신의 동네를 지나갈 때 그를 불러 한끼 식사 정도 하는 섬김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시간이 상당히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대접하다 보니 서로 좀 친해지는 순간이 왔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깊이 있는 대화도 하게 되고 선지자의 형편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그의 형편을 아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를 도와야 할 구체적인 부분을 더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시작했던 그 섬김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지자의 필요가 무엇인지 더 살피게 됩니다. 대부분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알고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선지자에게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살핌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 여인은 단지 한 선지자를 돕는다고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사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일을 돕는 분들이 되시기를 도전 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후원하고 있는 선교사님들의 사역과 형편에 더 관심을 가지기 원합니다. 개인적으로 아니면 목장 별로 이메일도 보내시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후원하고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매 월이 힘들다면 학기 별로 목장에서 후원 팀을 만들어 이메일도 보내고 기도제목을 나누는 모임으로 성숙되기를 부탁 드립니다. 혹시 선교사님들이 교회를 방문하실 때 그분들에게 식사나 주무실 장소를 제공할 수 있는 수넴 여인과 같은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는 섬김의 도전들이 더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넷째, 은혜는 겸손한 섬김으로만 마치려는 그 자리에 바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열정 어린 섬김에 대한 반대급부를 선지자에게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헌신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집에 머무는 자가 누구입니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들이 이런 수고와 헌신을 드린 후에 그들이 먼저 선지자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기도 제목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드리고 편하고 쉽게 하나님의 사역에 몰두하도록 돕는 일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들의 섬김이 섬김으로만 마무리 되기 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 가정에 임했다고 믿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준을 알 수 없기에 은혜는 주시는 분의 전적인 선물이라고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선지자가 너무 자신이 이 부부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루는이라는 단어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갑자기라기 보다는 늘 생각해 오던 것이 떠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 부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 한지를 묻게 됩니다. 그리고 남편이 어려워하는 일에 자신이 도울 일이 있는 지를 물어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의 대답은 자신의 백성 가운데 평안히 살기에 더 바랄 것이 없다고만 답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정에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셨습니다. 은혜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섬김의 모습으로 끝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그래서 섬김의 마침 자리에 하나님은 은혜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아낌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섬김이라면, 그 섬기는 자리에 돌려 주시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은혜는 가장 간절한 바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 부부가 선지자에게 자신들의 바램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한 때는 열심으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지 않자 그들은 더 이상 간구하기 보다는 자족하는 태도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께 서운해 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남들은 흉년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어 자식마저 빼앗기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이 부부는 넉넉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주어진 것으로 섬길 수 있음에 감사하는 삶이었습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갖고 선지자를 섬기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바램을 이제 다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늙어 도저히 자식을 얻는 것이 가능성 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물어도 다시 그것을 구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통하여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 부부에게 아이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전달됩니다. 사람들은 오래 간구하지만 잊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한번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먼 훗날에도 은혜로서 응답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가장 늦은 시간에 이미 다 포기하고 간구 조차도 하고 있지 않는 시간에 엉뚱하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내가 간구할 때는 반응도 없으신 분이 이제 기억에서 조차 없는 기도의 제목이 된 것을 어느 날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 만큼은 진정 내가 바라던 것입니다. 오랜 시간 소망하고 바랬지만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부부가 평생 마음에 소원하면 살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기에 이미 포기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내가 간구하지도 않았는데 응답하십니다. 나에게 믿음을 요구하신 적도 없는데 그냥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기적도 횡재지만 사실 은혜가 내게 임하는 것은 더 횡재입니다. 그냥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덤으로 받는 축복입니다. 이유 없이 굴러 들어오는 복 덩어리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나타나는 수단입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가장 순수하게 반응하시는 하나님의 보상 체계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사람도 다른 목적 없이 그저 순수하게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도 그 사람에게 다른 것을 요구함 없이 그냥 선물로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특별한 시련을 주시거나 아니면 큰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가장 순수하게 주고 받는 거래 관계입니다.  

 

성도는 나도 모르는 시간에 하나님이 다가오시고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에 대하여 값을 지불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나는 요구한 적도 없이 그냥 지나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꼭 갚고 가시겠다고 우리를 방문하십니다.

 

그 때와 정확한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 성도에게는 분명 은혜라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소원을 기억하시고 찾아와 응답하시는 은혜를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