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6): 용서함을 받습니다
시편 32:1-5
인생은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인간을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 짓고 난 뒤 평안을 누리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가장 인간이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죄 지은 것에 대한 용서의 순간일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았던 다윗이 경험한 용서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습니다. 최근 나의 삶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것들이 있다면 한 번 생각해 보면서 은혜가 함께 하길 원합니다.
먼저, 두 가지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았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하나는 ‘허물’이고 다른 하나는 ‘죄’입니다.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허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 법적으로 분명히 잘못이 있긴 하지만 죄 값을 물을 정도는 아닌 것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한편, ‘죄’는 잘못이 명백하여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죄값을 메기고 법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경우
사용하곤 합니다. 다윗은 이 둘을 분명 구분 지어 그 의미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용서받을 때 이 두 요소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도 됩니다.
우선 허물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 ‘페샤’는 transgression,
거역, 배반, 반역, 반항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이 단어는 남성명사로 사용됩니다. 한편, 죄(하타)는 sin으로 번역되고 여성명사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남성, 여성 명사로 구분되기에 남자들이 짓는 죄와 여성들이 짓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배반이 에덴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후 계속 인간의 삶에서 짓는 죄들이 창세기4-6장에서 기록되고 있습니다. 창조에서 남자가 먼저 만들어 지고 뒤에 여자가 창조 되었다는 관점에서
허물과 죄에 대해서도 남성, 여성 명사로 구분해서 사용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결국 허물은
창세기 3장에 언급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덴의 범죄 이후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갖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는 삶을 ‘죄’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둘째는, 허물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위해 허물과 죄라는 명사에 어떤 동사들을 구별하여 사용하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허물에 대해서는 ‘사함을 받고’라는 동사와 죄에 대해서는
‘가려지다’라는 동사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1절).
허물에 대해
‘사함을 받다’는 ‘용서 받다’로 대부분(공, 새, 현, NIV: forgiven) 번역합니다. 그리고 ‘가려지다’는 ‘벗겨지다’(공, 새) 또는 ‘덮어주다’(현, NIV, KJV, NASB: covered)로 번역됩니다. 히브리어 원어는 ‘용서받다’(나사)와 ‘덮어주다’ (카사)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앞에서 허물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성격의 측면이 들어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담이 사실 처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적으로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 속에도 그 죄의 속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허물이 예수 믿을 때 주의 보혈로 인해 용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이 짓게 되는 죄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십니다. 둘 다 법적인 용어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짓는 속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를 짓는데 십자가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은 나를 죄 없는 의인으로 불러 주신다는 것입니다(‘칭의’).
왜냐하면 주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셨고, 죽음에서 살아나셔서 내 모든 죄악을 가져갔다는 것이 확증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죄 없는 의인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반항적이고 배반적인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용서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면서
지은 죄들이 보혈로 날마다 덮어져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혈이 묻힌 나를
보고는 죄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심지어 자녀라고 불러 주십니다. 우리는
이런 나의 모습이 처음에는 어색합니다. 그러나 점점 변화됩니다. 점점
성숙되고 아버지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갑니다.
아버지가 새옷을
입힙니다. 헌신을 벗기고 새신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언약의 자녀임을
반지로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제 새 옷을 입은 것이 더 좋고 이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입니다.
이전에는 나를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함께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보니 왕 같은 제사장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상속자 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얼마나 귀한 복입니까?
세 번째는, 이제 용서 받은 사람의 내면의 모습을 한번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아쉽게도 이런 변화는 눈에 나타나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용서받은 우리 내면의
세계를 자기공명을 이용해서 뇌 전체의 영상을 얻어내는 MRI 처럼 한번 촬영을 하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집니다.
바로 그 설명이2절입니다. 허물과 죄 용서함 받은 사람은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간사함’이란 ‘마음에 거짓이 없다’(공, 현), ‘마음속에 속임수가 없다’(새)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2절을 더 정확히 번역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 33:21절에서 나온 ‘마음’(레브)과는 원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영혼’(spirit: 모든 영어번역)을 나타내는 단어(루아흐)입니다. 그러므로 2절의 정확한 번역은 마음이 아닌 ‘영혼에 간사함이
없다’ 아니면 ‘영혼에 속임이 없다, 거짓된 것이 없다’입니다. 먼저, 허물과 죄 용서는 우리의 영(spirit)과 관계 있다는 것을 우선으로 나타냅니다.
그리고 ‘간사’라는 단어는 교묘한 꾀(guile), 책략이라는
의미입니다. Be 동사와 함께 사용될 때는 느슨하다(slack), 거짓되다(deceit)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간사함이 없다’는 뜻은 우리 영이 틈을 주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거짓된 영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는 견고한
영의 상태를 말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영이 정결합니다. 더러운 다른 영을 받아들이는 자리를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오늘의 운수나 점치는 것에 마음이 쏠리는 그런 느슨한 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상 따위에 관심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용서받은 의인의 영적
상태입니다.
더 이상 마귀에게
내 마음을 내어주어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결단이 생깁니다. 이런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없이는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날과 단절을 의미합니다.
생각만이 아니라
내 삶이 실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 과거의 나쁜 습관들을
제거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거듭난 새 인생이 내 속에서 시작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또 이 증거를 통하여 내 속에 임한 성령의 임재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룰 것은 한 가지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의 엄청난 죄들도
한꺼번에 구원이라는 팩키지 안에 들어가서 용서함 받았음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짓는 죄들 또한 자동으로 없어지는 시스템 아닌가?’ 하는 질문에 분명히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
용서함은 우리의 과거의 죄 그리고 앞으로 짓게 될 죄에 대한 용서입니다. 미래의 것도
포함되지만 이 미래의 보장이 현재의 나의 죄에 대한 자동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짓는 죄에 대한
용서는 반드시 회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회개가 있을 때 용서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회개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용서가 안 일어나겠지요. 그러면 구원은 받은 후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갑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여러분이 이 정도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우리 보다
못하실까요? 우선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방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람들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죄를 지은 후에 회개하지 않을 때 다윗에
의하면 4절에서 마음을 짓누른다고 합니다. 그래도 끝까지 버티면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전쟁, 기근, 그리고 온역을 주어 고통 가운데서 죄를 깨닫게 만들고 주께 나아가 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고난보다는
구원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시간보다 지옥의 시간이 더 힘들기 때문에 시련을
주어서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은 회개에 대한 구약에서의 놀라운 선포를 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죄를 지은 백성들이 동물의 피로 용서함 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말로 자복하고
회개하라 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5절에 의하면 하나님께 상한 심령으로 나아와 주님께 자복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교만했습니다.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지 못했습니다. 내 형제를 미워했습니다. 정죄했습니다.” 회개는 나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나도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번
요즘 나의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 나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가?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자고 외치면서 신앙은 정말 주님이 원하는 기도의 자리에,
섬김의 자리에, 봉사의 자리에, 예배의 자리에,
배움의 자리에, 복음 전하는 자리에 내가 있는지를 살펴 보기 바랍니다.
이런 내 모습을 자복하고 아뢰어 용서받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