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7): 많은 것을 받고 삽니다
시편 31:7-24
하나님께
받는 것이 많은가 아니면 드리는 것이 많은가 한번 생각해 본적이 있는지요? 왜 나는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드리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까요? 저는 오늘 ‘하나님께로 엄청난
것을 받고 살았다’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은 성도에게 ‘사랑’을 공급하십니다. 우리가 받는 이 사랑에 대해 말씀 드리기 전에 본문에 나오는 번역들부터 정리하고자 합니다. 7절에 인자(개역), 16, 21절에
사랑(공, 새, 현)이 나옵니다. 이 단어들은 ‘헤세드’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으로 그냥 모두 ‘사랑’으로 통일해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특별히 내가 고난이나 환난에 있을 때 공급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가를
7절은 보여줍니다. 나를 좌절시키고 낙담시킨 고난을 먼저
보십니다(see). 그래서 이때 하나님이 내 처지를 잘 모른다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역경 속에 빠진 나를 안다(know)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냥 고난을 보기만 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보시고 상황을 처리해 가시는 분이십니다. ‘안다’라는 ‘야댜’라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정말 속속들이 어떤 사람을 잘 안다. 그리고
어떻게 그 상황을 이끌고 가야 할 것인지를 고려한다(consider, KJV). 그런 의미입니다.
벌써 여기서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역경의 해결자임이 나타납니다. 내 문제에 해결자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안심이
됩니다. 누군가 나의 힘든 상황을 이끄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 때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어서 8절은 나의 고난과 환난이 어떻게 바뀌는가를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않으시고”라는 말은 내 문제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조치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2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한 성에 갇혔을 때 사울에게
포위당해 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을 쳐들어오게 하여 사울의 군사가 돌아가는 장면을 기억나게
합니다(삼상23:27).
이어서
“내 발을 더 넓은 곳에 세우셨다”는 고백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하여금 다윗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왕으로 나아가는 꿈을 접지 않고 더욱 펼쳐 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막는 역경을 풀리게 하는 주님의 위대한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을 때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이 내게서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죽는구나’하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한숨도 나옵니다. 며칠
동안 잘 수 없었던 나에게 달고 깊은 단 잠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난리가 나도 주 안에서 나만이
느끼는 평강이 나를 둘러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봄학기는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인턴과 인터뷰, 직장과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계시는 분들, 논문이나 실험에서 막힘이 있는 분들, 특별히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에게 놀라운 주의 사랑이 공급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믿는 성도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께로 받고 사는 것 중에 또 다른 하나는 긍휼이 소개됩니다. ‘은혜’(개역)로 번역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다른 한글 번역들은(개, 공, 새, 쉬) ‘긍휼’로 번역합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이 단어가
가장 잘 설명되는 곳은 바로 창 6:8절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기에 사용된 은혜가 바로 긍휼이라는 히브리어 ‘하난’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가득한 온 천하를 홍수로 멸하려 할 때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노아만이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Noah
found grace(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노아는 주님의 눈에서 세상을 멸하려고
할 때 피조물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발견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마시고 장가들고 자신들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지만 노아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긍휼은
이런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제 길을 선택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입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창 6:6절은
소개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자녀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보고 마음 아파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창 6:7절에 보면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러하리니”라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화가 났는데도 누구 하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지 그만 하나님의 말을 믿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맑은 하늘에 비가 올 리 없었습니다. 비가
온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강들이 넘쳐 날 것입니다. 채소와 가축들이 쓸려가고 사람들도 조금 죽는
것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비가와도
세상을 온통 다 덮지는 않았다는 것 살아오면서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세상을 덮을 그렇게 많은 물이 어디에서
올 것이냐고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 때 준비한
깊음의 샘을 터뜨리시고 하늘의 창문을 열어 비를 내리게 하셨습니다(창7:11).
이제 우리
역시 종말이라는 주님의 재림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지막 때가 다가올 때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누가 믿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과연 주님의 재림을 믿을까요? 바로 우리 믿음의 성도들입니다. 재림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함이 아니라 믿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긍휼과 짝을 이루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근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우리의 문제들로 인해 근심도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며 애통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로 근심 가운데 있는 자에게도 하나님은 분명 관여하십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한 애통함을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은 분명 긍휼로 다가오십니다. 온 우주에 불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죽음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바라볼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선하심’을 더하십니다. 19절을 보면 ‘은혜’라는(개, 개정) 단어를 봅니다. 다른 번역들은(공, 새, 현) ‘복’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영어 성경은 대부분 ‘goodness 선하심’으로 번역합니다. 이 단어는 특별히 하나님의 창조 모습에서 계속 발견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때 그 단어와
동일한 ‘토브’라는 단어입니다. 아름답다, 좋다, 선하다, 착하다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 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선하심’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합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 생각을 말씀으로 하신 것, 그리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선’입니다. 그래서 19절에 사용된 ‘선하심’이라는
단어 앞에 ‘쌓아두신’ 이라는 특별한 수식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성도들을 위해 쌓아두신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 창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국 변함이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또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만 변하지 않으면 그 선함을 맛볼 수 있다는 보장입니다.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주께로 피하는 자들에게 이 선하심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뜻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에덴 동산에서 처음 지으신 아담이 그렇게 했던 모습입니다.
창조부터
보여진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불변의 진리입니다. 피조물이 정한 룰이
아니기에 그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로 ‘선’이라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을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스런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을 입은 우리는 이
땅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세상이 만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우리 성도를 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 속에서 고생하고 터지고 맞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이 고통과
아픔을 해결하는 자들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성도를 통해 하나님은 이 땅에 평화를 만들어 내고
이 땅이 다툼과 분쟁으로부터 평화를 누리는 ‘선’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세 가지를 당부합니다. 이 좋은 것들을 베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아하브,23절). 그리고
고난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보며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들을 지키는 복된 성도님들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