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8): 슬픔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시편 30:1-12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슬픔을 간직한다는 것입니다.
슬픔은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인생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하고 한 사람을 성숙되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먼저, 다윗은 살면서 슬픔을 느끼는 자신의 경험들을 소개합니다. 1절을 보면 원수 같은 사람으로부터 모욕감을 받을 때입니다. 경쟁자에게 밀려 승진의 기회를 잃은
때일 수 있습니다. 또 경쟁업체와 경쟁하다 파산하여 전 재산을 잃어버리는 순간 가질 수 있는 느낌입니다.
이때 사람들
마음속에 일어나는 하나가 있습니다. 이 나쁜 일이 나에게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어느 정도 감지 못할 정도로
관여 정도는 했다는 것입니다(“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인생 실패에서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2절은 살다가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병이 드는 일이 있었던 같습니다(공: “병들었던 이 몸을 고쳐 주셨습니다”). 성경은 그가 언제 병들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려고 신하들과 모의를 하던 (삼하15장) 그 때인 것 같습니다.
아들의 반역을
보며 다윗은 서운한 마음을 7절에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전에는 산 같이 높이 올리셨는데 갑자기 얼굴을 가리시며
원수들 앞에서 수치와 창피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백성들이 전쟁 영웅 다윗을 칭송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병들자 자신을 도왔던 신하들이 배신하여 압살롬 편이 됩니다.
게다가 아들이
아비를 죽이려 합니다. 여기서 또 한번 인생의 슬픈 맛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3절은 그때의 절대 절명의 위기를 잘 말해 줍니다. 도망가는 다윗을 추격하여 그날 밤 강을 건너기만
하면 끝이 나는 순간입니다. 생명의 위기마저 느끼는 순간 하나님은 전혀 함께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가장 비참합니다.
2주전 수퍼볼에만 역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마지막에 반전을 좋아하십니다. 반전이 있기에
우리는 슬픔이 기쁨이 되고, 눈물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올해 추수감사절에 성경에서 나오는 감사로 연극).
다음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슬픔은 있지만 세상과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슬픔의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징계를 받아 고난
가운데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짧았다’고 말합니다. 이 때 다윗은 기쁨으로 자연스럽게 춤을 추게 됩니다.
11절에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고’에서 춤은 남아있는 슬픔의 찌꺼기를 소각해
버립니다. 과거에 사로잡힐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춤이 나오지 않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춤은 우리들의 발목을 묶고 있는 슬픔의 줄을 풀어버립니다.
찬양 가운데 춤추는 분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진짜
춤 추기를 좋아했습니다. 블레셋에게 뺏긴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도 춤을 너무 추워 옷이
내려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법궤를 잃어버린 민족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는 민족이라는 자신감을
회복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춤은 소망과 희망의 에너지를 솟아나게 합니다.
슬픈 기억들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도는 여기까지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끝에서 확실한 차이가 납니다.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때 “자신들의 한이 풀렸다. 나쁜 기억들이 사라졌다, 나의 억울함이 풀렸다” 등으로만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으로 변하는 마지막은 감사의 고백이 따릅니다. 여기서 ‘은혜’로 번역된 ‘하난’이라는 단어는 ‘긍휼히 여긴다, 불쌍히 여긴다’의(창6:8) 의미입니다. 홍수 심판 때 노아에게 베풀었던 긍휼은 특별한 것입니다. 믿는 그 사람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모두가 곧
홍수로 심판을 받아 죽는데 노아만이 구원을 허락 받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3, 9, 11절에서 무덤과
초상집에서 입는 베옷이 언급된 이유입니다. ‘긍휼’은 죽음 가운데 나
만을 위한 특별한 구원을 맛보게 하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너무나 스페셜하지 않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베푸시는 긍휼을 맛볼 때 우리는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이 기쁨을 맛본 다윗은 잊지
않고 성도가 해야 하는 마지막을 12절에서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을 향해 ‘영원히 내가 주께 감사하리라’는 특별한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봄학기에 특별히 가족이나 본인이 아프신 분들께 하나님의 긍휼이 흘러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살아가면서 믿음이 아닌 지나친 긍정적 사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라 하였도다.” 듣기에
매우 자신감 있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세상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살아간다고 칭찬을 들을 수도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더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죄 짓지 않는 사람이야. 바르게 살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늘 의롭고 바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야. 나는 절대
불의에 타협하는 일이 없어. 절대 거짓에 흔들리지 않아. 끝까지 잘
가 거야.’ 모두가 이 땅에서 한번도 슬픈 일이 생기기 않으면 참 좋겠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정치가들, 사업가들, 학계에 종사하는 분들을
봅니다. 그런 분들이 처음에 다 올바른 마음먹고 정치를 하고 사업과 교육에 뛰어 들었을 것입니다.
누가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바라는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윗 자신도 그랬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6절입니다.
자신감과 교만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자신감은 있어야 하지만 그 도가 넘어갈 때 만용이 되고 교만으로 굳어집니다.
그 기준은 ‘내가’입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모든 면에 긍정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내가’ 늘 주안에, 말씀 가운데 서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 안에
서 있는 ‘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
가운데 있는 성도는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가 어디로부터 기인했는지를 빠르게 알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은혜’입니다.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세상에서 정말 잘 나가는 사람이 되었는데 지금은 정말 엉망이 되었습니다. 뭐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엉망이 된 원인이 내 잘못인지는 불 불명합니다. 이 의미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시편 31장에서 ‘은혜’로 번역된 하난(긍휼), 토브(선하심)와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은혜’로 번역된 ‘라촌’이란 말은 의지, 뜻(will, selfwill, desire)이란 의미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지금 내게 근심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뜻, 의도하심이 있어 나를 근심 가운데 두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데 알 수 없는 슬픔을 만날 때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것임을 인식하는 태도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슬픔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2주 전 시편 32장을 기억하며 죄로 인해 고난이 온 경우를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아무리 찾아도 내가 지은 죄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원망이 잘 나옵니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왜 내게 이런 슬픔을 주십니까?’ 제가 아무리 보아도 교만하게 행동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모질게 나오십니까?’ ‘주님 교회 충성스럽게 섬기는데 왜 이런 슬픔이 내게 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런 때에 우리가 답을 찾아가는 자세를 보여줍니다.
과감히 하나님께
원망을 멈추고 진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더 알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8절에서 해답을 찾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간구를 선택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드디어 9절은 다윗이 찾은 답이 소개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누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까?
이미 흙으로 된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습니까?’
뭔가 감이
오지 않습니까? 아무리 전쟁을 통해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하고, 물질을 쌓고 명예를
얻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것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기도 가운데 알게 됩니다. 그런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다시
간구 속에서 찾은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찬양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진리를 선포하는데 도구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때부터 전쟁을 하면서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하게 되며 나중에는
설계도까지 솔로몬에게 넘겨주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이라는
신분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진리를 선포하는 자로 이용하기를 원함을 알았을 때 다시 변하게 됩니다. 그는 왕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곡을 모으게 합니다. 더 나아가
본인이 직접 시를 지어 하나님의 진리를 만대에 선포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며 울부짖을
때 고난이 내게 온 이유를 스스로 답으로 토해내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까지
울부짖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회개하고 잘못을 생각해도 이유가 없을 때 고난 가운데 드리는 기도가 바로
답입니다. 그 간구 가운데 하나님은 답을 두고 계십니다. 성도가 고난이
오면 더 기도해야 하는 이유임을 믿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