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9):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합니다
시 29:1-11
성도로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의 소리를 직접 듣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들에게 하나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는 자세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소리는 잘 들립니다. 1절에 의하면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권능 있는 자들’은 여러 해석들이 있지만 권위와 능력을 가진 왕을
말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사람으로 인정 되었습니다.
이런 왕이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린다는 뜻은 자신보다 더 높은 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입니다. 겸손할 때 누구와도 소통이 잘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기 않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교만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요즘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있는지를 점검하시면 됩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의 소리를 죽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면 그분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위험한 것입니다. 너무나 하나님 뜻과는 다른 길로 갈 수 밖에 없겠지요. 슬픈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바로 이어지는 2절이 그 해답입니다.“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사람 앞에서 입은 옷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입어야 되는 거룩한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합니다. 자신이 어떤 신분을 가질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부와 명예와 신분을 벗어 버리고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나아가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에게 참 중요한 것입니다. 한 주간 하나님께 멀어졌던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가면 갈수록 나의 거짓과 죄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경험 할수록 우리는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지성소로 나아갈 때 제사장만이
입는 거룩한 옷을 입었습니다. 제사장의 옷처럼 우리의 허물을 가려주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 가운데 원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기를 원할 때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다양하게 영광 돌리는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 음성은 잘 들립니다. 1, 2절에서 ‘영광을
돌리다’가 3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영광 돌리는 행위 그 자체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방법을 찾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경배 받기를 원합니다.
인간을
로봇처럼 프로그햄화 시키지 않았습니다. 늘 반복되는 기계적인 소리를 원치 않습니다. 창조적 능력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피조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다른
피조물들과 차이 나게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호흡으로 불어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사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수금과 제금 등 악기로 노래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기묘한 악기를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든 그대로의 모습인 자신의 날개만을 흔들어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 노래 가사도 창의적이지
않습니다. 들어보실래요.
사 6:2-3에 의하면
“…여섯 날개로…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계4: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고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계7:12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인간처럼 현악기(수금 비파), 관악기(퉁소 나팔), 타악기(소고
제금)등의 다양한 악기로 찬양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내용도
인간처럼 다양하지 못합니다. 천사들의 한계이고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물은 어떨까요? 강아지나 고양이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일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오직 하나님을 아는 영을 소유한 인간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여기서 드리는 예배가 최상의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시간을 지키고 참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통만 따라 가서도 안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형식만을 추구하는 변신만 해서도 안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는 내가 먼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전적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이 되어 성령이 함께하는 예배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는, 하나님 만드신 자연과
친밀한 사람이 하나님의 소리를 더 잘 듣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소리를 간직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소리를 간직하는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그런데 자연이 하나님의 소리를 간직하고는 있지만 직접 들려주지는 못하는 한계가 또한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선물을 주었습니다. 직접 자연이 그 소리를 들려주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나쁜 기억들로 상처 입은 분들이 자연에서 치유 받는 모습을 봅니다. 자연과 인간의 마음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연을 만나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80-90년대에 교회들이 많은 기도원을 산에 지었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바쁜 일상을 떠나 자연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많은 은혜를 받은 기억들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비전센터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곁에 두고 악한 영을 쫓도록 가까이 했습니다. 신뢰해서 군대장관으로 임명 했습니다. 믿어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아내를 잃었습니다. 지위를 잃었습니다. 명예에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큰 상처와 기억을 갖고 사람조차 접촉할 수 없는 자연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북부의 울창한 숲과 높게
솟은 백향목들을 가진 레바논과 시룐(헐몬산, 신 3:9)일대였습니다(6절). 동물들만 살 수 있는 남부의 가데스 광야로 갑니다(8절). 다윗은
자연이 제공하는 천연요새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은
살 수 있는 공간만 제공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소리를 간직하고 있기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재료가 풍부하게 있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살면서 우울하다, 슬프다, 무기력하다, 힘들다는 생각은 한번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연을
누리시면서 주님의 음성을 많이 듣고 가시기 바랍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분은 화폭에
담아 하나님을 찬양해 보기 바랍니다. 다른 분은 시로 표현하고, 또
다른 분은 그 시를 작곡하여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바랍니다. 감탄만 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소리를 드러내도록 우리의 재능이 쓰임 받는 분들이 많이 나오기를 소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연 속에서 무슨
소리를 들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3절에 비가 내리면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점차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집니다. 다윗은 그 날 단지 비 소리만
들은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날이었습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소리는 천둥 소리와 같이 힘이 있고 위엄 있는 소리였습니다.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자연을 보면
만드신 분이 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이 한계를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to be like God,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허상을 품게 합니다. 이것을 ‘교만’이라
부릅니다. 5절에서 멋지게 높이 치솟은 백향목이 그것을 상징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이스라엘 주변에서 가장 높이 자라는 나무입니다. 인간의
교만을(왕하 14:9) 상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백향목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다윗은 듣습니다. 어떤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세상의 힘과 권력을 가진 사람도 하나님이 다스림을 선포한 것입니다.
꺾인 백향목은
세상 권세자들 위에 있는 근원적인 악의 힘인 사탄을 의미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나한테 절하면 이 모든 세상과 영광을 다 줄 것이다’는(마 4:8-9) 사탄의 유혹을 이겼다는 선포입니다. 영원한 죽음인 사망을 이긴 승리의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고통의 지옥의 불을 이기는 모습이 7절의 ‘화염을
가르시고’라는 말에서 보여집니다. 무덤 문을 여시고 사망을
이기는 부활의 소리가 8절에 광야를 진동시키는 소리에서 들려 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9절의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케 한다’(개역, 새)는 번역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소리는 암사슴의 ‘새끼를 낳게 하십니다’(KJ, NA). 그리고 완전히 화염으로 타버린
땅에서 어린 사슴을 위해 새싹들을 나오게 하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사실 이런 자연의 모습은
11절의 하나님의 마지막 소리를 듣기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시고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선사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절망 가운데 태어난 어린 사슴에게도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것은 염려와 걱정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10절에서 다시 확인됩니다. 홍수로 다 멸절 된 땅에 싹을 내게 하십니다. 노아에게 새롭게 된 땅을 다스리라고 명령하는 왕 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약속입니다. 자연에서, 예배 가운데서, 말씀 가운데서 그 소리를 듣는 성도가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리는 질병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가운데 있는 모든 분들에게 소망과 약속으로 들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