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10): 삼박자의 신앙생활
시 28:1-9
주부에게는
주부의 삶이, 학생에게는 공부하고 평가받고 진학하고 학위를 받는 삶이 있듯이 성도에게도 필요한 신앙생활이
있습니다.
첫째로, 성도는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늘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모습이 1절에서 ‘반석’에 나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반석은 늘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거대한 바위입니다. 광야로 도망
다니면서도 늘 그 바위에 나가 앉는 삶을 살았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말도 안되는 행동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위에게 무슨 말을 합니까? 바위가
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위는 늘 다윗이 찾아줄 때 그 자리에 서 있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바위를 여호와 하나님처럼 부릅니다. 사람은 들어주지
않았지만 반석 같은 주님 앞에 앉기만 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늘 그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바위는 늘 그 자리에 서서 수많은 나그네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의 사정을 들어 주었습니다. 사람은 짜증도 내지만 바위는 늘 침묵하며 들어 주었습니다.
성도는
죽은 바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귀 없는 바위가 아닌 영원을 살아 계시며, 인류가 품었던 고민들을
들어 주신 분입니다. 살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 넋두리라만 해도 속이 시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사소한 것까지도 하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광야 같은 성도의 인생도 외롭기 마찬가지입니다.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 때가 부르짖어야 할 시간입니다. 성도가 기도해야 할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생활 가운데 소중한 습관을 2절에서 소개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지성소를 향하여 손을 듭니다. 지성소를 향하는 것은 기도의 방향성입니다.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를 이어온 바위와 같은 분, 늘
나의 위로가 되신 분에게 아뢴다는 믿음입니다.
다음으로
자신의 손을 듭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 신호입니다. 나의
어려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아버지가 아니라는 확신가운데 손을 듭니다. 쉬울 것 같지만 참 손 들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한번 들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 여기 있어요, 나 문제가 있어요, 이제 나를 도와 주실
차례예요.”
손을 드는
이유는 내게 어려움이 있음을 하나님께 확실히 전달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기도할 때 손을 들었던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사소한 필요에서부터 정말 무덤에 내려갈 정도까지 큰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 손을 드는 기도가 삶의 한 가운데 자리 잡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성도는 기도 응답이 늦어질
때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힘들 때 부르짖어야 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움 요청이 하나님께 확실히 전달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응답이 없다면
답답합니다. 응답이 늦어지는 예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이가
있습니다. 뭔가 필요해서 엄마에게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막상
달려왔지만 아이는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다른 경우는, 말하려고 하지만 내용이 뒤죽박죽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도 곤란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면 알아듣기 힘들 것입니다.
이쯤 하면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하나님 쿵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로 알아 듣지 못하세요. 하나님이 못 알아듣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뭔가 필요해서
막 달려왔는데 막상 왜 왔는지 몰라 하는 아이일 수 있습니다. 이때 부모는 무엇을 구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생각나게 하려고 기다려 줍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기도가 지연 되었나 봅니다. 1절에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라는 구절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3-5절이 나중에 확실히 정리된 기도의 내용들 입니다. 때로는 기도하는데
정말 내가 구하려고 하는 것을 올바르게 요청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 예는, 아이가 책상에 앉아 있습니다. 대부분 숙제를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다 갖다 놓고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필요한 것이 생깁니다. 손만 펼치기만 하면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는 멀리
있는 엄마 부릅니다. ‘이것 주세요. 저것 어디 있어요.’ 라고 무조건 도움을 요청합니다.
물론 아이가
어릴 때는 늘 부모가 그 자리에 함께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이제 막 시작할 때는 실시간으로 주어지는 기도응답으로 정말 신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자라면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마는 늘 그 아이에게 눈을 떼지는 않습니다.
‘엄마 풀
어디 있어요?’ 이제는 엄마가 직접 뛰어와 손에 직접 지워주지 않습니다. ‘옆에 있어.’ ‘어디요? 테이블
밑에 굴러 떨어졌쟎니.’ 싱크대에 있는 엄마는 아이보다 더 잘 주변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한 분들조차도 예화의 이 아이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응답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응답이 늦게 올 때는 ‘이제 내가 정말 아이가 아니구나. 야 신난다. 나도 이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구나.’ ‘내가 정말 철 없는 아이처럼 굴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그냥 도움만 요구했구나.’ 깨닫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를 돕기 싫어서 응답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답이 적혀 있는 해답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손만 뻗치면 지척에 답이 있습니다. 신앙이 점점
성숙 되어가면 주님은 말씀을 읽고 묵상에서 해답을 얻기를 바랍니다. 놀랍게도 말씀은 우리 인생의 모든
질문에 대한 응답임을 믿음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찬양 생활이
있어야 함을 6,7절은 말씀합니다. 다윗의 찬양생활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찬양이 늘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손 쉬운 방법은 찬양을 귀에 듣는 습관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는데도 나의 기도에는 응답은 없습니다.
이때 성도는
‘아하 입술로 내가 찬양을 안했구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찬양을 부르는 삶을 시작합니다. 문제는 앞에서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삶은 그대로입니다. 무기력은 지속됩니다. 이쯤 되면 ‘찬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단지 찬양은
귀로 듣고, 입술로 노래하는 것 이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찬양은
들어 내 마음에 단지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 불러 단지 내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때 나오는 내 감정의 풍성한 반응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왜 나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지 않을까요?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저는 어렸고 믿음도 없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늦게 예수를 믿었지만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고
돌아가셨음을 나중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린 저는 단지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놀랍게도 저를 부르는 아버지 음성을 듣곤 했습니다. 꿈에도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어린 저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게는 찬양이 전혀 없었습니다.
지난 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꿈에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주무시던 침대에서 잤는데도 잠 한 번 깨지 않고 잘 자고 일어 났습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꿈에 나타났다면 어머니도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꿈에도 나타나지 않아 정말 서운합니다.
그런데
입술에서는 찬양이 흘러 나옵니다.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아버지
경우 그때 저는 예수를 알지 못했고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꿈에서 아버지 목소리만 그리워하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경우는 제게 이미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저를 전혀 다르게 반응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어머니에게 하신 일을 찬양하게 만들었습니다. 혹시
믿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천국에 가셨는지 궁금해 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비록 음성도
듣지 못하고 꿈에도 보지 못할지라도 나의 입술의 찬양으로 말미암아 어머니가 천국에 있음을 확신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찬양은
환경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찬양은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찬양은 내 믿음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환경은 서운하고 정말 답답하지만
내 심령의 깊은 곳에서부터 찬양이 흘러 나옵니다. 그 어떤 것도 찬양을 막지 못합니다.
찬양이
요즘 나오지 않는 분들은 환경이 여러분을 사로 잡아서입니다. 믿음의 반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분명 믿음은 있는데 그 반응하는 센스가 너무 무디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 센스를 수리해야 합니다. 이 과정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찬양은 늘 기도와 함께 짝을 이룹니다.
기도와
찬양, 찬양과 기도는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믿음이 먼지에 덮여 있을 뿐입니다. 입술의 찬양을 통해 먼지를 걷어 내는 작업이 바로 찬양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의 센스가 다시 살아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말씀, 기도, 찬양입니다.
말씀, 기도, 찬양. 이 삼박자의 신앙생활로 제대로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