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12): 주님 이루신 일을 선포합니다
시 26:1-12(쉬운성경)
오늘 단기
선교팀 파송식을 가졌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간증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이루신 일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속에 주님이 이루어 놓은 것을 선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가장 중요한 선포는 나를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1절에 다윗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쉬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안 지은 엄청난 죄들을 지은 사람입니다.
로3:10절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어찌 다윗은 자신에게서 죄가 없음을 밝혀 달라고 말할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가 없음을 스스로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죄 없음을 하나님이 인정해 달라는 요청을 1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죄 없음의 결정권 자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깨끗하게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죄 짓지 않고 살아 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죄 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 역시 그의 일대기를 보아도 늘
죄가 그의 곁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깨끗하게 산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죄를 안 지어 죄 없이 사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짓지만 용서받아 죄가 없어졌기에 깨끗해지는 삶임을 말해 줍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다윗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할까요? 죄
지으면 지은대로 두었다 심판 때 벌 주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애써 죄를 용서해 주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할 때부터 하나님이 인간 안에 거하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곳을
‘영’이라고 부릅니다. 영은
하나님만 모셔 두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을 모셔 둘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약에는
동물 피가 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을 때 죄 용서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1절하반절에 ‘두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는 말은 다윗 자신이 죄 용서함 받았다는 것에 대해 한번도 흔들림 없이 확실히 믿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어떤 죄에도 불구하고 보혈로 깨끗해졌음을 하나님이 밝혀줄 것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깊이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영만이 거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나를 바꾸어 놓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이 땅에서 이미 우리가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어디 있을까요? 누가 갈까요? 모두들 궁금해하는 죽음 이후
문제를 대부분 종교는 나름 내로 소개합니다. 분명 천국은 죽어 가는 곳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 땅에서도 누리고 있다고 다윗은 천국 삶을 4-5절에서 소개합니다.
거짓말쟁이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과 나쁜 일을 행하는 사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 땅에 살면서도 이런 천국의 삶을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이루셨다고
선포하는 이유입니다. 성도는 천국이 이미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가장 먼저 외치신 것이 바로 ‘천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 땅에 이미 이루어진 천국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천국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은 단지 장소를 옮겨 영원히 하나님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이 땅의 천국에 사는 백성들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천국은 눈물도 애통함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눈물이
있고 애통함이 있을까요? 그것은 단지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는 죄 짓지 않는 모습으로 모두가 변하여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처럼 살아야 그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은 지옥 같은 인생을 살고 죽어서는
낙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을 맛보며 제한된 시간에 살다가 영원한 낙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새로운 삶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성도는 새로운 성화의 삶을 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인생 가운데 심판을
정해 두었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9절에 보면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누구나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으로
인해 그 이후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철학이 되었고 보안이 종교인 것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죽음 이후에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다윗은 별로 선한 일도 하지 않은 자신이 살인자와 같은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영혼이 악인들과 함께 죽는 것을 원치 않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죽음 이후 악한 자와 선한 자 사이에 분명한 분리가 반드시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사람들이 정말 가지 않고 싶은 곳이 확실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자나 나쁜 행위를 한 사람들과
자신이 구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윗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모두가
죽어 같은 곳에 가고 그곳이 좋은 곳이라면 왜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구별되기를 원하겠습니까? 이것은
죽음 이후 누군가의 정한 기준에 따라 구별하고 분리되는 심판이 있음을 뜻합니다. 여기까지 타 종교와
별 다를 게 없습니다. 차이는 누가 선한 자이고 누가 악한 자인가의 구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9절 하반절에는 놀랍게도 다윗 자신을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철저히 속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살인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다윗과 우리가 동일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음이 증명됩니다.
분명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완전히 용서 받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외칠 수 있는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의인으로 설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에 “나를 속량하시고 은혜를 베푸소서” 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누가 돈을 주어 내 빚진 것을 다 갚아주었다는 뜻입니다. 종의 신분에서 풀려 자유함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음 이후 영벌이라는 심판에 처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의 모든 죄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지고 죽은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들어왔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결과는 지옥이라는 심판의 족쇄에서 풀려 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날 나의 모든 죄를 눈같이 희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설령 내가 이 땅에서 살인자인임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자신은 ‘아니다’라고 선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선 선 우리를 보실 때 죄 없다 말하는 근거가 바로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래 맞아 내가 그렇게 하길 내 아들과 만세 전에 약속했어,
그런데 너는 정말 그것을 믿었구나. 내 말을 믿어 주었구나, 고맙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내가 죄 있다는 것을 아는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뻔뻔하다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죽어 영원한 지옥에 가야 될 사람이 천국 영생을 누린다면 그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이
은혜를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이 인류에게 제시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땅에서 죄까지 면죄 받고 감옥에도 가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값을 이 땅에서 철저히 받았습니다. 하지만 1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신의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서 여호와를 송축한다고 노래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반석에 굳건히 서서 누가
뭐라해도 자신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불러주시는 의인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 심판 없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한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이 믿음이 모두의 입술에서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