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네 번째 십자가 위에서 말씀

27:46

 


올해도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천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27:45절을 보면 육시부터 구시까지( 12-3) 어둠이 온 사방을 덮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주님의 네 번째 말씀이 십자가에서 들려 온 것입니다.  

 

먼저 살펴볼 말씀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절규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 아버지께로 버림을 당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반복되는 외침에서 느껴지는 것은 정말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버림 당하는 처절함입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원망이 없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중에 원망이 왜 없어요 바로 이어서 원망이 들려오는데요라고 말씀하실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이 없다는 증거는 두 번이나 반복되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원망이 있었다면 우선 관계부터 끊고 그 다음 말을 이어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주님의 입에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고난이 온다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 몰라요를 외칩니다. 기도도 안합니다. 성경은 던져 버립니다.  힘들 때 더욱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간이 길어질 때 인내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부부가 결혼 서약을 할 때 건강하거나 병들 때도, 부하거나 가난할 때, 기쁘거나 슬플 때도 서로 사랑할 것이라는 맹세를 합니다. 주님과 우리는 신부와 신랑의 관계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순간도 아니고 여섯 시간이라는 장시간의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게다가 십자가 처혐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심한 극형에 해당되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를 악물고 아픔을 견디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 시간 만큼은 주님을 홀로 두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가장 힘들고 아파하는 순간에 얼굴도 내밀지 않습니다.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될때 40일 광야 금식 기간이 마쳐졌을 때에는 천사를 보내 시중을 들게 해 주셨습니다. 온 세상의 고통을 지고 가는 순간입니다. 6시간 이상의 고통이 있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아픔을 누그러뜨려 주어도 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사랑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상 살다보면 우리도 어렵고 힘든 고난의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도 사랑의 고백만을 상실하지 않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은, 절규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이유를 알기 바랍니다.  죽어가는 아들의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강심장을 가진 부모가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그 순간에  침묵하십니다.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들이 죽는 그 자리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 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진행되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세 시간 동안 어둠이 온 세상을 덮었던 이유일 것입니다.  

 

과연 아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하나님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주님은 요 14: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사역 가운데 우는 모습을 봅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11:35), 로마에 의해 파괴될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19:41). 한 번더 히 5:7절에서 언급됩니다.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록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다면 분명 하나님도 우셨을 것입니다. 오래 전 맬깁슨의 “Passion of Christ”라는 한 장면에서 눈물 한 방울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독의 연출일 뿐입니다. 실제는 어둠이 그 시간에 있었기에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물이 땅에 떨어졌을지라도 땅이 흔들립니다.

 

너무 우연치고 뭔가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눈물이 실제 현장에서는 감추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의 죽음이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소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세상 죄를 진 어린 속죄 양으로 쓰임 받았기에 하나님은 주님을 버려두셔야 했던 것입니다.

 

눈물 한 방울 없는 침묵의 최종적 이유는 부활때문입니다. 죽이지만 살아날 소망으로 침묵하셨습니다. 다시 살 소망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슬픔보다는 기쁨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죽음으로 마무리는 되는 것이 아니라 사망 권세를 이긴 부활이 승리로 장식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댓가를 치른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의 고난을 그대로 침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아들과의 사흘 동안의 단절을 경험하셨던 것입니다. 오직 부활이라는 마지막 승리를 위해 아들을 침묵 가운데 두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들으면 주님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이 땅에 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의논하신 후에 인간이 되어 우리 곁에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죄로인해 죽는 다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고 지옥에 던져진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또한,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실제로 주님이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고 합니다

 

간혹 인터넷에 자신의 죽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중계하려고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떨까요? 아마 주님의 절규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한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냥 한 인생이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영원한 사망 가운데 들어가는 모든 인간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이 외침은 그들의 모든 절규를 대신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을 알기에 이 땅에 주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지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외침은 바로 이 큰 아픔을 인간에게 주고 싶지 않는 사랑입니다. 또한 이 절규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처리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죄는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납니다. 사망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됨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죄를 어깨에 짊어진( 1:29) 주님에게 저주와 심판이 내려집니다. 그 고통이 너무나 커서 주님도 소리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예수라는 사람이 외친 소리라고 외면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죽음이라는 문턱에서 자신들이 외칠 절규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모두 대신 지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들이라도 죽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죄를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이 심판을 나중 받게 됩니다. 하지만 구원 얻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영적 사망 가운데 있는 분들입니다. 육신은 살아도 하나님과 더 이상 사랑과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절규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하나 뿐인 독생자가 대신 죽으며 외친 소리입니다. ‘너희는 이 고통을 당하면 안돼, 영원히 타는 불가운데 던져지는 그 고통을 겪어서는 안돼. 그래서 내가 대신 당하는 거야. 나는 너희를 사랑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사순절이 마쳐가는 시점에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은 주님을 모르는 분에게 다가와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죄의 심판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왜 예수가 나를 대신해서 죽었는지를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힌번도 주님 앞에 나아가 감사와 사랑을 고백해 보지 못한 분들이 계신다면 오늘 조용히 남아 주님께 기도하시기를 권고합니다. 주님은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에게 찾아와 주십니다.

 

그 복을 오늘 이 밤에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