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4): 흔들리지 않습니다 

1:18-20, 2:12-15

 


교회 다니면서 어떻게 구원 받는가에 대해 들으면서 헷갈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온 후에는 믿음으로만 구원 받습니다. 뭔가 일관성 없는 구원관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이것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구약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그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18:5). 행함이 구원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을 행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까?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함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답은 더 근본적인 것을 잃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율법을 지키게 했던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 하나님의 뜻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단지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게 함도 있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강조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이방인들 가운데 율법을 지킴으로 이스라엘 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의미는 세상의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동물의 제사를 드려 자신의 죄가 용서함 받는 율법도 결국 그 행위 안에는 믿음이 없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진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30: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36:26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어지는 겔36:27에는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29에서 육신의 할례가 아니고 마음의 할례를 원한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율례와 규례를 지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결과는 맞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적됩니다.

 

율법이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믿게 하여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거룩을 유지하는 율법들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단지 거룩을 유지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형식만 강조된 것입니다.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31:33은 이렇게 말합니다.”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무엇이 중요함을 말해주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오기 전 구약시대 율법은 구원에 이르는 도구임에 맞습니다. 그러나 그 도구를 든 사람의 믿음을 빠뜨리고 단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 많은 신들 가운데 창조주이며 구원자임을 믿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경험하면서 하나님만이 구원자 되심을 믿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어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유월절의 피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경험했습니다율법이 주어진 시대에도 율법을 지키는 자의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왜냐하면 행위로는 의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제사라는 믿음의 행위가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 행위로서 의를 이루지 못하는 부분을 제사의 행위가 보충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제사 행위 자체도 믿음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용서함을 믿기에 행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구원관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어떠했을까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아담과 아브라함, 노아 등이 살았던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는 아담에게 전에 없었던 것이 나타났습니다. 무엇이 선이며 악인지를 스스로 알게 됩니다.

 

이 의미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행할 때 자신이 행하는 것이 맞고 틀리 다는 것을 인간의 본성인 양심이 그것을 알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사건 이후 아담과 하나와는 벌거벗은 것에 대해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부끄러움과 수치가 그들의 양심을 통해 전달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원칙은 율법과 예수를 알지 못하고 살았던 수많은 이방인들과 지금도 밀림 속에서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모르고, 율법도 알지 못하고 죽었던 사람들과 지금도 한번도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율법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들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마음의 양심이 율법대신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4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그러므로 왜 우리에게는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고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양심에 따라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노아일 것입니다. 세상에 죄가 가득할 때 선한 양심으로 살던 사람입니다. 6:5에 보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할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때 노아는 6:9에 의하면 의로운 자이며 당대의 완전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완전하다라는 의미는 우선적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평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양심이 들려주는 소리를 무시하였지만 노아는 죄를 지을 때나 볼 때 요동치는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악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그의 행함이 있기 전에 악을 멈추게 한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심장이 뛰고 마음이 불안하고 뭔가 어색한 느낌을 줄 때 악한 것 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왜 내 양심이 꺼려하는 일이 일어날까? 누가 이렇게 만드셨을까?

 

집에 키우는 짐승들도 새끼를 낳고 나도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면 누가 인간을 만드셨는가? 분명 인간을 만드신 분이 계심이 분명해 그리고 그분이 죄를 바라보거나 내 손이 악을 행할 때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어. 이런 것이 자연 속에 숨겨진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는 인간의 지혜이며 본성입니다.

 

1:20을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 전에도 양심에 따른 행위의 모습에도 그들의 확신과 믿음이 자리잡지 않으면 선한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설명을 하다보면 오해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인간 본성에 의해 구원이 결정된다면 복음듣기를 거부하고 그냥 양심대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후 예수를 접하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게다가 에수를 듣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양심으로 산다할지라도 몇 사람이 의에 이를 수 있을까요? 행위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위해서도 자신의 거룩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양심이 죄없는 모습으로 설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가장 최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선적으로 선택된 사람들(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구약의 인물들에게 직접 나타나시기도 하고 메시지를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율법이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 예가 바로 창15:6의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일관된 구원관은 오직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시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 흔들림 없는 구원관을 가진 복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