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생존법(1): 무너뜨리고 세울 것들
왕하 18:1-12
신입생 여러분들께 먼저 축하를 드립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타카와 코닝, 코틀랜드에 오심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여러분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더 바라기는 여러분의 꿈만 이루기 보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어 내시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을 이곳에 오게 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꿈은 있지만 아직 비전을 발견하지 못한 분들은 비전을 보여 달라고 간구 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위해 온 가족들도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름이 다 가지 않은 시간이고 더욱 아름다운 가을을 조금 있으면 즐기게 될 것입니다. 다들 오시기 전에 이미 들어 아시겠지만 긴 겨울이 또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힘들어 하지만 제대로 생존 법을 익히신다면 이곳에 계시는 동안 문제가 없을 줄 믿습니다.
한 가지 팁을 드린다면 겨울을 북부 업스테이트에서 잘 보내는 방법은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분은 열심을 다해 도서관을 찾으시면 되구요. 성경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연초부터 매년 업스테이트 뉴욕 5개 교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말씀을 배우는 NYBC에 조인하시면 됩니다. 선교를 사랑하는 분들은 1월부터 시작되는 코넬한인교회 이디오피아 선교에 조인하면 됩니다. 그리고 피가 끓은 분들은 연애에 빠지면 됩니다. 이것만 해도 코넬한인교회 성도가 해야 할 10가지가 있는데 벌써 2-3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겨울이 너무 짧고 빨리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서 살더라도 삶 자체가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이타카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바쁘고 복잡한 삶을 살아내야만 생존할 수가 있습니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능력은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낼 수 있겠습니까?
첫째, 새 학기 생존비법은 여러분의 삶을 주 안에서 단순화 시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주 안에서는 불가능이 없기에 우선 가능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이 있기에 가능하게 됩니다. 그것을 오늘 말씀 가운데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학교들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생존전략을 나름대로 계획할 때 3가지 측면에서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학업에서, 일상 생활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적 생활에서 잘 이겨내어야 할 것을 결심했을 것입니다.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생각은 이 영역들이 사실 따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는 분리되는 삶의 영역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삶도 하나님 안에서 보면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비전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삶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복잡한 삶의 영역들이 하나로 모이게 됩니다. 공부도, 나중 얻게 될 직장도, 인생의 목표들이 하나 된 가운데 이루어 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주신 비전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에 삶의 영역들이 따로 분리되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 안 되기에 공부는 공부대로 따로 해야 되고 삶은 삶대로 구분되어 살아가는 이분법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이 모든 영역들을 바라보면 구분 없이 하나되어 ‘하나님 앞에서의 삶’으로 단순화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3절에서는 ‘하나님이 보시는’ 삶으로 소개합니다. 이곳 코넬에서의 여러분들의 삶의 영역들을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전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복잡한 나의 삶의 영역을 단순화 시키는 방법입니다. 복잡하고 해야 할 일이 많은 이곳에서의 삶을 넉넉히 성공적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둘째, 새 학기 생존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저희 교회 첫 번째 비전으로 제시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입니다.
예를 하나 소개 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는 아하스입니다.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이방 종교의 전통을 따라 산 왕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해서 태워 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우상들을 섬깁니다(16:3-4). 더구나 유다를 위협하는 앗수르에게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스스로 굴복하여 조공을 받칩니다. 그것도 모자라 앗수르의 신전을 모방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 신의 제단을 만들게 합니다(16:10, 역하 28:24-25).
그런데 이 패역한 왕의 아들이 히스기야입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아 그대로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기를 결정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정직히 행한다는 것은 세상의 윤리적 차원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긴 시간을 통해 내려온 전통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가르치는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입니다. 비록 그것이 세상과 갈등을 만들어 내고 부모의 가르침과 다를지라도 우선 순위를 하나님 말씀에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옳게 여기는 삶, 그분의 말씀이 맞다는 태도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만 살아가겠지요. 이것을 이스라엘 왕들에게 하나님은 계속 선지자를 보내 경고했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역대하 29:3절을 보면, 히스기야는 왕이 된 첫 해 첫 달에 가장 먼저 성전을 수리합니다. 아버지가 파괴하고 더럽힌 성전을 회복하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하게 됩니다. 그는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삶을 뉘우치며 인생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왕하 18:3). 그가 정직히 행하게 된 비결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길을 보여준 것이고 그 길을 따라 걷게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입니다. 한 학기를 보내는 동안 말씀에 따라 사시고 1년에 성경을 일독 하기를 목표로 삼고 새 학기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새 학기 생존법은 내게서 제거해야 할 일과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을 구체화 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히스기야는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드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수는 일들을 그의 일생을 통하여 수행합니다.
생존은 나를 위협하는 것으로부터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히스기야 역시 그가 왕이 될 때 생존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북이스라엘을 위협하고 마침내 무너뜨리게 되는 앗수르의 공격입니다. 히스기야는 위협의 원인을 여러 곳에서 찾게 되지만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너져 가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이 그것을 깨닫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왕하 18:10).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절에 유다의 히스가야가 왕이 될 때 북이스라엘 왕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호세아 왕은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6년 정도 뒤에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선지자들이 계속해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고 그 원인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라는 것을 배우고 알게 됩니다(아모스, 호세아). 그리고는 자신이 왕이 되어 다스리게 될 남유다를 바라보게 됩니다. 너무나도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모습을 보며 그는 개혁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히스기야의 개혁’이라는 것입니다.
학부 신입생 되시는 분들은 이제까지 삶의 방식을 벗어 버리십시오. 부모님의 지도하에 공부하고 지도하는 대로 살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계획하고 의지를 가지고 창의적으로 살아가는 모드로 전환 되셔야 합니다. 늦게 일어나면 부모님이 깨워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는 곳이 대학입니다. 여러분이 깨뜨릴 것을 찾고 무너뜨려야 될 것을 찾아 부서 버리십시오. 그리고 새롭게 이곳에서 세워나가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재학생 되시는 분들에게도 당부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배들에게 도전을 주는 것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다름 아니라 주일에 시험을 치는 일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앞으로 미국에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아직 주일에 학교에서 시험 안쳐서 점수 못 받는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교수님들도 다른 날로 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학생들이 하루라도 빨리 마치고 쉬고 싶고, 떠나고 싶어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새 학기에는 온 성도가 내 삶에서 구체적으로 도전하는 영역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새 학기 생존법은 5-6절에서 히스기야가 했던 모습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주님과 연합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의 불신앙을 보며 고민하며 자랐습니다. 잘못된 죄악을 벗어버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기 위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결단합니다. .
왕이 된 히스기야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은 북으로부터 위협하는 제국의 위협이었습니다. 떨쳐낼 수 없는 위협 속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강대국의 신을 예루살렘에 성전에 모시는 배교를 하였습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현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하 17: 7-23절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불순종함으로 망하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더 두려워하게 됩니다.
결국 누군가를 의지한다는 것은 더 강한 것을 붙잡는 다는 것이고 그 강한 것이 그에게 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는 올바른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며 그분께 의지하며 나아간 것입니다.
그 첫 의지의 표현이 바로 7절 하반절에 기록된 앗수르에 대한 배반입니다. 더 이상 앗수르에 종으로 살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갖다 받치던 조공을 멈추게 됩니다. 들리는 소리는 좋은데 한편으로 너무 무모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대뽀로 그냥 밀어 부치는 것일까요? 기말시험은 일 주일 뒤인데 그냥 하나님 믿고 퍼지는 것일까요? 그런 행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확실한 포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무엇이 히스기야로 하여금 이런 무대포처럼 느껴지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6절에서 처럼 그분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 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 지혜는 우리를 과감하게 움직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마침내 ‘히스기야 터널’을 착공하게 됩니다(역하 32:30, 525m). 이것은 적들이 자신들의 예루살렘 성을 둘러싸고 포위작전을 할지라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수로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늘 이스라엘의 적들은 성을 포위하고 가두어 두는 전략을 구사하였습니다. 이런 전술을 아는 히스기야는 대응하는 작전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당장 앗수르를 상대할 수 있는 공격적인 군대를 길러낼 수 없는 상황에서 최상의 방어작전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지하를 파서 땅 속으로 물을 성 밖에서 끌어 드리는 토목공사였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전부 바위를 파서 만든 지하수로인 것입니다. 성 밖의 물의 근원을 막아 버려 적들로 하여금 독을 풀지 못하고 자신들의 물 공급을 찾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를 배반할 수 있었던 배짱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할 때 하늘이 주는 지혜였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할 때 주어지는 지혜로 공부도 하고 논문도 쓰시고 막히는 실험도 풀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재미입니다. 예수 믿는 복입니다. 그래서 예수쟁이가 살 맛 나는 것입니다. 다들 안 풀려 죽겠다고 하고 실제로 죽는 사람도 있지만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풀리게 됩니다. 그 복을 한번 맛을 보시고 코넬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일생을 통해 여러분을 담대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난관에도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으로 서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도 살리는 인물이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보다 먼저 졸업하고 나간 선배들의 간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귀한 간증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